인도에서 가난한 인간의 존엄 위해 노력

인도 콜카타의 데레사 수녀가 9월 4일 바티칸에서 시성되었다. 시성식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했다.

교황은 시성미사 강론에서 “그분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지친 사람들 위에 몸을 숙였다. 그분은 세상의 권세 있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느끼게 했다. 이는 그들이 범죄-그들로 인해 야기된 가난의 범죄- 앞에 자신들의 죄(잘못)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데레사 수녀 시성의 의미를 기렸다.

▲ 콜카타의 데레사 시성식 전경. (이미지 출처 = 바티칸 TV)

그는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우리 삶의 주인공은 언제나 두 명이다. 하느님과 인간들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인식하는 것 즉,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우리 곁에 있는 자매, 형제들은 하느님의 얼굴이므로 그들의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 사랑(Charity)은 자매, 형제들에 대한 봉사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 약한 이, 노인들이 바로 교회의 현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더 데레사는 음식 맛을 나게 하는 소금처럼 삶의 맛을 더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낸 분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가난한 이들 중에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데레사 성녀는 봉사에 봉헌된 삶의 모델이다.”라고 했다.

▲ 시성식에 걸린 콜카타의 데레사 초상. (이미지 출처 = 바티칸 TV)

데레사 수녀는 흔히 “마더 데레사”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Mother"는 신부(Father)에 대응하여 큰 수녀원의 원장수녀에게 붙이는 경칭으로서, "마더 데레사"(Mother Teresa)는 "데레사 수녀원장"이라는 뜻이지 사람 이름은 아니다.

그녀는 지금은 마케도니아 땅인 스코페에서 알바니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로레토회 수녀가 되어 1929년에 인도에 갔고 1947년에 인도 국적자가 되었다. 1950년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웠고 1997년에 죽었다.

콜카타의 데레사는 인도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세우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이들을 돌보며 살아생전에 이미 많은 이로부터 성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녀가 사람들을 가난하고 버려지게 만드는 불의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비판한 이들도 있었다.

▲ 사랑의 선교회의 콜카타의 데레사를 떠올리게 하는 흰색과 파란색을 조합한 사랑의 십자가. (이미지 출처 = 바티칸 TV)

가톨릭교회에서는 어떤 이가 죽으면 아무리 훌륭해도 5년이 지나야 비로소 시복시성을 추진할 수 있지만, 그녀를 크게 존경했던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조건을 면제하고 즉시 시성 작업을 추진하도록 허락했다. 데레사 수녀는 2003년에 “콜카타의 데레사”로 시복되었다. 콜카타는 캘커타의 지금 이름이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에서 가장 좋은 자리-교황 제대 앞-를 가난한 이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들 1500명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랑의 선교수녀회가 운영하는 환대의 집에 머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시성식 뒤에는 바오로 6세 강당에서 이들에게 나폴리식 피자를 곁들인 점심을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과 함께 직접 나눠 줬다.

▲ 콜카타의 데레사 시성식에 참석한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과 인도 사람들. ⓒ김영수 수사

인도의 그라시아스 추기경은 <크룩스>의 존 앨런 기자에게 데레사 수녀가 죽은 지 20년이나 됐지만, 인도인들은 종교를 가리지 않고 데레사 수녀를 아주 존경하고 있다고 밝혔다.

앨런은 가톨릭 신앙에서는 사랑과 의지가 결합될 때 진정한 힘이 생겨나는데, 아마도 데레사 수녀가 이를 가장 잘 보여 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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