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9월 4일(연중 제23주일) 루카 14,25-33

오늘 복음은 ‘누구든지’라는 보편적 부르심에 ‘버리는 사람’이라는 특정인이 요구되는, 보편과 개별의 틀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치밀한 계산과 판단의 과정을 불러오는 두 가지 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말하자면, 보편적 부르심에 합당한 자는 치밀한 계산과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뭐든지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건, 자신을 철저하게 포기하거나 제거하는 겸손 혹은 희생 정도로 읽힐 이야기가 아니다. 이유인즉, 치밀한 계산과 판단이라는 주도적 노력과 그 의지를 표출하는 하나의 자아가 형성되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자기를 버리는 적극적 주체성이 ‘제자’라는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는 일이 된다. 보편적 부르심은 그리하여 옛 자아에 대한 포기이자 새 자아에 대한 개별적 결단을 촉구한다. 신앙한다는 것은 보편적 부르심에 맞갖는 새로운 자아로 만들어 갈 줄 아는 지난한 도전이다.

불행히도, 보편적 부르심은 언제부턴가 얼마간 왜곡된 형태로 우리 신앙 안에 끼어들어 있다. 예컨대, 선악에 대한 구별 없이 모두에게 웃음을 지어야 한다는 도인과 같은 성직자, 수도자. 자신의 가치관과 교회의 가치관의 구별 없이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선에서 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대개의 신자들. 사회가 어떻든 제 삶의 기득권이 유지되는 선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외치는 진보 신앙인들. 이런 이들에게 보편적 부르심은 실은 각자도생의 방편일 뿐이다. ‘나는 자비하다’라는 영화 "300"의 대사에나 어울리는 자기 중심적 삶의 자세를 더욱 견고케 한다. 제 삶의 프레임과 시스템에 경도된 신앙 생활은 누구든지 불리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되 자기를 버리는 일엔 무감각해진다. 그리하여 제자됨의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적 가르침과 가치관을 희석시켜 분해한다. 그 결과, 생태와 환경을 논하면서 핵발전소와 사드를 찬성할 수 있고, 성경의 가난한 자들을 배우고 익히면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제 삶의 성공을 위해 경쟁과 능력, 그리고 처세를 중히 여긴다. 여기엔 경쟁이 아닌 함께 살고 도와야 할 세상도 자연도 없고,(창세 2,15.18) 성공할래야 할 수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도 없다. 그런데 어쩌랴.... 예수는,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함께 살려고 자기를 죽이고, 가난해지려고 또 죽어갔는데....

▲ 십자가 위에서 죽어간 예수. (이미지 출처 = www.goodfreephotos.com)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끊어 내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작업을 통한 하느님에 대한 선택과 집중의 작업을 요구한다.(루카 9,23-26; 마태 10,34-39; 갈라 2,20)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 안에 평화를 얻기까지 우리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삶의 목적이 하느님이고 그 시작이 하느님인 우리의 처지(창세 1,26-27)에서 우리가 가장 우리다울 수 있는 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갈망할 때 그렇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제 삶이 곧 당신의 삶이길 요구한다.

하느님의 제자가 된다는 건, 지금 내 삶을 성찰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찰보다 전복(顚覆)이 필요하며, 개혁보다 과감히 되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아닌 것’을 붙들고 ‘맞다’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 아니면 새로 만들면 된다. ‘누구든지’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면, 한 명이라도 참된 신앙인을 찾아 바로 ‘저 사람이 예수의 제자요’라고 외치는 게 낫다. 그게 ‘누구든지’ 붙들고 현실을 핑계로 신앙을 타협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낫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