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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자비는 너무 멀리 있고 고통은 늘 가까이 있지만"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자비에 관한 통합적 성찰)", 서공석 외 18인, 분도출판사, 2016
김지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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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02  16: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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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비가 그저 개인의 내면에 머물면서,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사회로부터의 도피성 자기 위안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비의 희년은 자비가 일상적 언어로 번역되고 사람들의 일상 안에 들어올 때에야 삶을 변화시키는 유의미한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찬수)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12월 8일부터 2016년 11월 20일까지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면서 사랑과 용서를 베풀며 살아갈 것을 요청했다. 교황은 이미 인류를 고통의 질곡으로 몰아넣는 ‘무관심의 세계화’를 단죄한 바 있다. 전 세계의 상당수는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고 있음에도 굶주리고, 포성은 그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땅에서 추방되어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공동의 집’을 살아가는 지구 이웃들에게 자비는 멀리 있고 고통은 늘 가까이 있다.

실로 자비가 절실한 지금 매우 시기 적절하고 우리를 깊게 돌아보게 하는 의미 깊은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에서 19인의 필자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자비를 설명하고 성찰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종교와 자비'는 여러 종교에서 자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살펴보며, '2부 오늘 우리에게 자비를 묻는다'에서는 고통스런 한국사회의 현실과 연결지어 우리 시대의 자비를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1부는 먼저 그리스도교의 자비에 대한 논의로 문을 연다. 서공석의 '특별기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자비'에서는 예수의 메시지와 실천에서 자비를 찾는다. 예수의 메시지와 실천의 원천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아빠 체험에서 비롯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안에 살아 계셨던 자비로운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는 것이고, 예수의 아빠 체험을 현실로 자기 안에 받아들인다. 결국 예수에 대한 신뢰는 예수의 지상 생애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실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소한 힌두교의 자비는 "우파니샤드"의 ‘친절’ ‘불살생’(不殺生)을 통해 논의된다.(나혜숙)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즉, 자기 비움에서 진정한 자비가 가능해진다.(오지섭) 공자에게 그리스도교의 자비와 깊게 관련된 덕목은 어짊(仁)으로 관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불의에 단호하던 품성으로 설명된다.(이수태) 어머니의 사랑으로 비유되는 노자의 자비는 자연을 본성을 회복할 때 성취되는데, "도덕경"에서는 무심, 무욕, 무위로써 자비가 실현된다는 점을 밝혀낸다.(최수빈) 무교의 자비는 비단 살아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확대된다. 죽은 사람 역시 ‘만백성’의 범주에 포함되며, 죽은 사람을 도와주는 방법 역시 구체적이다.(김동규) 우리에게 자칫 왜곡된 이미지로 비쳐진 이슬람에서는 신의 분노가 자비를 이기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이슬람의 하느님은 무한 자비의 하느님이다.(박현도) 이처럼 여러 종교에서 논의하는 자비를 향한 다양한 길은 우리 모두가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종교적 진리 속에서 구현된다.

2부에서는 자비가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를 모색한다. 이찬수의 '모방과 공감: 사랑과 자비가 그저 말뿐이지 않기 위하여'는 자비는 선언적으로 무수히 표출되지만 우리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종교인은 많지만 왜 세상은 평화롭지도 않고 이 지경이란 말인가? 사랑이나 자비가 그저 언어나 관념으로만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나 자비라는 말은 흔하고 쉽지만 실제 경험하거나 실천하기는 너무 어렵다. 그것은 현실과는 무관한 그저 기대와 희망의 언어일 뿐인가? 필자는 너무 멀리 있고 이상적이기만 자비를 보통 사람의 눈높이로 재정립하기 위해 사랑과 자비의 대용어로 ‘공감’을 선택한다. 자기중심적 공감이 아닌 타자 지향적 공감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런 공감력이 확장할 필요성이 있음을 논의한다. 아울러 공감 자체만으로 사랑과 자비가 구현되지 않지만, 자비를 향한 단초를 마련해 준다. 이찬수의 글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비를 우리 삶의 공간으로 가깝게 불러온다.

2부의 필자들은 ‘헬조선’으로 운위하는 이 땅의 현실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모색하고 구현해야 할 자비의 속성을 묻는다. 자비는 더 이상 가난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 시혜로 볼 수 없다. 이미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나누어 준다’는 말보다 ‘나눈다’는 말이 옳다고 지적했다. 시대적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사전적 의미의 자비는 자칫 억압적 시스템에 대한 면죄부로 작동할 수도 있다. 또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끝까지 책임지고 싶지 않아 고통받는 사람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욕망을 알아차린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선을 행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그의 손을 잡고 돈을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선만이 아니라 책임 있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자비는 비인간화의 고통과 인간화의 구원을 서로 나누는 관계론적 사건”이다.(정경일)

   
▲ 광화문 세월호 천막 주변에 걸린 현수막 그림. (사진 출처 = 지금여기 자료사진)
교사 황주환에게 학교는 전혀 자비로운 공간이 아니다. 자비롭지 못한 학교에서 자비를 가르치거나, 자비롭지 못한 세상을 자비롭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아름다운 말과 침묵 그리고 망각으로 점철된 교육 현실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질문이라 한다. 질문만이 현실의 가면을 벗겨 불편한 맨 얼굴을 마주하게 하고, 세상을 바꾸는 답을 찾게 한다. 박병상은 자비의 범위를 인간을 넘어 동물에게까지 확대한다. 야생동물을 비롯해 수많은 동물들이 로드킬 당한다. 인간만이 자신의 터전에서 밀려나지 않는다. 동물 또한 인간에 의해 자신의 터전에서 밀려난다. 생명공학은 인간이 동물을 얼마나 무자비하고 사물처럼 대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인간이 무지와 편견을 벗고 동물을 대한다면 “상처받은 자연의 이웃에 대한 자비가 그렇듯 사람 자신을 기쁘게 한다.” 환경 파괴의 재앙 속에서 자비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로 확장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1주년을 맞아 발표한 메시지에서 가톨릭의 7개 자비실천 덕목에 환경보호를 새로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또 환경에 대해 저지른 죄를 사하여 달라고 청할 것을 권고했으며, 이윤만 남기면 된다는 이기적 제도에 대한 용서를 구하라고 말했다.

교황이 말한 이윤추구의 이기적 제도는 바로 자본주의일 테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체제는 본질적으로 자비롭지 못하다. 박승옥은 “자본주의는.... 약 200년 전 영국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 본능을 극단화시켜 만들어낸 그야말로 기이하고도 어두운 맘몬의 경제체제”라고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자비는 공감을 통한 연대와 저항으로 귀결된다. 말랑말랑한 사랑의 말로 덧칠된 자비는 더 이상 자비롭지 못하다. 자비는 고통을 직면하며 불의와 맞서 저항할 때 오롯이 구현된다. 고통에 연대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자비를 온전히 실천하는 이들이다. 강정에서 싸워온 수도자 양운기는 평화를 향한 저항에서 자비를 찾는다. 강정을 비롯해 쌍용자동차, 삼성백혈병, 용산참사, 밀양송전탑, 세월호, 기룡전자, 한진중공업, 콜트콜텍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연대의 자비가 절실한 현장이 많다.

구미정의 '여성과 자비: 여성, ‘뜨거운 돌’로 부활하다'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노동운동사에서 최초로 허공에 오른 장주룡이다.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한 1931년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였던 서른한 살의 그는 억압적 노동 환경에 맞서 12미터 높이의 을밀대(대동강)에 올라 9시간 30분의 고공농성을 한다. 사람들은 그를 ‘체공녀’(滯空女)라고 불렀다. 그는 결국 체포되었지만 조선총독부와 식민지 자본권력의 항복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조선팔도의 대중은 그의 목숨을 건 고공농성에 눈물로 화답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또 다른 장주룡이 곳곳에서 싸우고 있다.

자비의 희년은 서서히 저물어 간다. 교황이 단죄한 ‘무관심의 세계화’에 맞선 자비의 길은 이제 시작이다. 자비는 고통받는 이에게 손을 내미는 데서 시작한다. 또 그 고통받는 이가 나일 수 있다고 공감하고 연대하면서 확장될 것이다. 이 책은 자비가 자칫 공허한 말 잔치에 머물 위험성을 넘어 그 시작을 위한 발판을 다각도로 다지는 작업을 해낸다.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며 자기 안에 허둥지둥할 때 크고 작은 수준에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 시작점을 좀 더 선명하게 잡아 준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현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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