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나들이]

<그림 좌> 삼화령 미륵삼존불의 동자 모습의 보살, 신라, 7 세기.
<그림 우>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 보이는 선재동자상, 고려후기, 14세기.

어린이 구원자?

종교적 전통에는 공통되는 몇 가지 구원자상이 있다.

첫째는 왕과 같은 구원자상이다. 힘과 권위를 가진 위대한 구원자상이다. 성서의 전통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이 ‘다윗 왕’이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도 사실은 크게 보면 그와 같은 구원자상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위대한 어머니로서 구원자상이다. 왕으로서 구원자상이 부성적 구원자상이라면, 이것은 모성적 구원자상이다. 성모 마리아라든지, 불교의 관음보살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는 민간 신앙의 많은 신앙의 대상이 그와 같은 모습을 지녔다. 모든 탄원을 다 들어주는 중보자로서 구원자상이다.

세 번째는 어린이 구원자상이다. 동자상이다. 아기 부처 혹은 동자승,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아기 예수상이다. 부성적ㆍ모성적 구원자상이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타심을 대변한다면, 어린이 구원자상은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순수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 그 구원자상을 떠올리는 것은 스스로 순수한 내면의 세계를 돌이켜 보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 구원자상은 의타적이라기보다는 자기성찰적 성격을 지닌다.

우리 역사에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 온다. 어린 단종을 폐위시키고 많은 충신을 죽이면서 등극한 세조는 말년에 무의식적인 죄책에 몹시 시달렸다고 한다. 조선의 왕들 가운데 드물게 불교중흥책을 펴기도 했던 세조는, 말년에 그와 같은 정신적 고통과 더불어 등창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겪었다. 어느 날 심신을 쉬기 위해 오대산 월정사에 들러 물 좋은 그곳 계곡에서 남몰래 혼자 멱을 감고 있는데, 웬 동자가 나타나 멱 감는 것을 도왔다. 덕분에 시원하게 멱을 감은 왕은 동자에게, “내 몸에 등창이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 동자는 조용히 임금님 귀에다 입을 대고 말하기를, “아무에게도 아기 부처님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 동자는 사라지고 등창은 말끔히 나았다는 전설이다.

순수한 내면의 세계로의 복귀, 진정한 자기성찰의 사건이 몸과 마음의 병을 말끔히 씻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은 어린이 구원자상이 뜻하는 자기성찰적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어린이와 같지 않고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와 예수님을 ‘귀찮게’ 했다.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른들을 꾸짖고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어린아이들을 가로막는 제자들을 꾸짖고 어린아이들을 가로막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중요한 선언을 하신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팔을 내밀어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신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우선, 어린이는 사회적인 약자를 의미한다. 여인과 어린이, 그리고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인 약자를 대표한다. 이들은 한 마디로 기존의 사회에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어린이와 같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다”는 선언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기에, 따라서 기존 사회의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기에, 그런 의미에서 ‘흠 없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들은 기존 사회에서는 거꾸로 기존 사회의 질서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죄인’ 취급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꾸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죄인 취급당한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는 순결하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누리지 못한 이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편 이 이야기는 어린이의 속성과 관련된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어린이다운 속성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내면의 순수함과 통하는 속성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어린이들의 순수성을 말한다. ‘어린이가 순수해?’ 매일 말 안 듣는 어린 자식들과 지지고 볶는 처지에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말을 동의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에게는 때 묻지 않은 순수성이 있다. 예컨대, 예민한 감수성과 유연성, 단순성, 그리고 어린이 특유의 친화력과 놀이를 통한 창조성 등등이 어린이다운 속성이다. 사람이 성장해가면서 상실해가는 속성들이기에, 거꾸로 끊임없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시장의 법칙을 넘어서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도 새삼 들여다볼 것 같으면 무척 흥미롭다. 약간의 상황 설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전하는 네 복음서는 공통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군중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의 해법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가 두드러지게 대비된다. 이 대비되는 태도는 빵의 문제, 경제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의 상반된 시각일 수 있다.

먼저 제자들을 보면 당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생각해 낸 것은 딴 데 어디 가서 돈으로 먹을 구해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돈으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시장의 법칙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태도다. 예수님의 해법은 바로 나눔의 지혜였다. 그 해법의 열쇠를 쥔 주인공이 어린아이다. 예수님은 그 아이가 지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두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거기에서 기적이 시작된다. 그 어린아이가 지닌 것을 두고 감사드리고 난 후 나눴을 뿐인데, 오천 명이 충분히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지닌 사람이 어린아이였을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나? 어린아이는 순수의 세계를 상징한다. 생명 본연의 법칙을 상징한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요한복음의 표현을 따르면, ‘하늘의 빵’이다. 하늘의 삶을 땅 위에서 보여줌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 삶을 따르도록 하신 분이다. 그 삶을 따르면 누구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이치를 몸소 구현하고 보여 주신 분이다. 그분이 인간들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다. 곧 그분과 같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진실을 모른다. 오병이어 기적 현장에서도 사람들은 그 진실을 모른다. 바로 그 때 어린아이가 등장한다. 그 어린아이는 인간들 가운데 함께 하는 예수님의 또 다른 분신과도 같다. 중요한 진실은, 지금 예수님도 그 어린아이도 모두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빵을 누릴 수 있는 해법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린아이는 그 진실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그 진실을 일깨워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 어린아이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생명의 빵과 하늘나라가 있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일깨워 주는 존재다.

순수에 대한 갈망

오늘날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원초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인간이 고도의 지능과 고도의 문명을 갖추게 된 생물학적 조건이 무엇이었을까? 놀라운 사실은 바로 생물학적 결핍 내지는 불완전 상태가 역으로 지능과 문명을 발전시킨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스스로 거동한다. 반면에 인간은 태어난 지 수 년이 지나야 겨우 스스로 몸을 가눈다. 그러고도 십수 년 내지 이십 년 가까이 계속 성장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의 상태를 상당 부분 보존한다. 동물학적 용어로 말하면 ‘유태보존’이라 하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 조건이 다른 동물들이 따라올 수 없는 지능을 갖추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조건이 된 것이다.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가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다 준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농담 같은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을 비롯한 옛 사람들이 현대적 의미의 생물학적 지식을 터득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은 현대적 지식이 아직 미치지 못한 생명의 원리를 더 깊이 통찰하게 했을 것이다.

어린이를 가로막는 어른의 세계는 순수성을 잃어버린 세계다. 신록의 아름다운 계절에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기뻐할 수 있다면 아직 우리들 가운데 순수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일 터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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