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사제와 가톨릭일꾼 운동

(패트릭 오닐)

1976년에, 프랭크 코데이로라고 하는 젊은 사제가 공동체를 세우려는 한 젊은이 무리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미국 아이오와 주 디모인의 가톨릭일꾼 공동체다. 이달 26-28일에 코데이로와 창립 멤버들은 디모인에 모여 지난 40년간의 평화주의와 무료급식소, 그리고 자신들이 받았던 징역형을 기념한다.

코데이로는 지금은 사제가 아니다. 그는 그간에 비폭력 직접 행동으로 100번 넘게 체포되었고, 6년이나 징역을 살았다.

“디모인 가톨릭일꾼이 디모인의 리버벤드 지역에서 지난 40년간 했던 공동체 생활, 환대 활동과 사회정의 활동을 되돌아보게 되니 기쁘고 흥분된다.”

40년 전, 당시 디모인 교구 모리스 딩먼 주교의 지지 아래, 가톨릭일꾼 운동의 창립자인 도러시 데이의 비전을 따라 디모인 공동체가 뿌리를 내렸다. 당시 창립 멤버는 3명이었다.

이번 모임은 가톨릭일꾼 운동의 역사에 한 이정표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코데이로는 이번 기념 모임을 한 가지 금지된 주제에 대한 대화를 끌어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그는 전직 메리놀회 사제로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된 “로이 부르주아 신부”(코데이로가 보낸 초청장에는 그를 “신부”(Fr.)라고 썼다.)를 초청해 “평화, 정의, 그리고 평등을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기조연설을 맡김으로써 가톨릭일꾼 운동의 불문율을 넘어섰다. 또한 “재니스 세이버-두진스카야”도 프로그램에 들어 있다. 세이버-두진스카야 또한 파문된 가톨릭 여성 사제로서, 부르주아는 2008년 8월에 그녀와 미사를 공동집전했고 이 때문에 자신도 파문되기에 이르렀다. (편집자 주-두진스카야에 대해서는 Fr.(Father, 신부) 대신에 Rev.라고 칭했는데, 이는 “존경하올”(Reverend)이라는 뜻으로서 이 또한 가톨릭교회 안에서 사제에게 붙는 경칭이고, 개신교 목사들도 이렇게 많이 불린다. 주교는 Most Rev.(지극히 존경하올)이라고 붙인다. 두진스카야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에 Fr. 대신에 Rev.를 선택한 듯하다. 여성 사제를 두고 있는 한국 성공회에서는 일상적으로 “신부”라고 부르고 있다.)

부르주아와 두진스카야는 미국에서 가톨릭 여성 사제를 가장 크게 주장하는 이들이고, - 아마 세계에서도 – 이번에 “미국 가톨릭교회가 더 귀를 기울이고 심판하지 않는다면 여성에게 어떻게 보이게 될까?”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함께 토론자로 참여한다.

이번 행사는 가톨릭일꾼 공동체에서 열리지 않고 근처의 트리니티 연합감리교회에서 열린다. 두진스카야는 또한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딩먼 하우스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일 전례를 집전할 예정이다.

예상되듯이, 이 공동체와 코데이로가 여성 서품을 부각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디모인 교구의 입장과 맞지 않지만, 코데이로가 지난 40년간 거쳐 온 가톨릭일꾼계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칭찬받고 있지는 않다.

코데이로는 2014년에 두진스카야를 초대해 디모인 가톨릭일꾼 센터에서 미사를 집전했고, 이 때문에, 리처드 페이츠 주교는 코데이로에게 편지를 보내 교구 사제평의회는 이곳 가톨릭일꾼 센터가 (성당이 아님에도) 미사를 집전할 특전을 줬던 것을 철회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음을 알렸다.

“사제평의회 구성원들은 도러시 데이의 유산과 그녀가 그렸던 가톨릭일꾼 운동의 철학을 높이 평가합니다.” “구성원들은 또한 그녀가 사회정의 영역에서 동료 가톨릭 신자들에게 과감히 도전했으며, 그녀가 교회의 전례적 전통들에 아주 충실했고 아주 엄격히 따랐음을 압니다.”

여론 조사들을 보면 미국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여성 서품을 지지하지만, 가톨릭일꾼 운동에 속하는 많은 이들은 여성 서품과 동성 혼인에 관해서는 신중한 태도다. 도러시 데이가 1980년에 죽은 뒤로, 신자들과 가톨릭일꾼 운동가들은 어떤 일이 있으면 “도러시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토론을 자주 벌이곤 했다. 가톨릭일꾼 운동가 중에는 개별적으로는 여성 서품을 찬성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공개 주창하는 이는 그보다는 적다.

▲ 아이오와 주 디모인의 가톨릭일꾼 딩먼 하우스. (이미지 출처 = NCR)

자유와 권위의 갈등

도러시 데이의 손녀인 마사 헤네시는 뉴욕 가톨릭일꾼 공동체에 있다. 이곳에서 데이가 1933년에 가톨릭일꾼 운동을 시작했다. 헤네시는 데이는 전쟁과 가난을 없애기를 우선했던 데 비해 코데이로는 “2차적 문제”(여성 사제 서품)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믿는 가톨릭일꾼 운동가들 가운데 하나다.

그녀는 <NCR>에 코데이로가 이번 디모인 가톨릭일꾼 기념회에 자기를 초대했는데 “나는 거절했다”고 밝혔다.

“나는 그가 지켜야 할 (가톨릭일꾼) 원칙이 있다고 보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 도러시는 (가톨릭일꾼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평생의 사랑을 포기했고 그 뒤로는 죽 독신을 지켰다. 자신을 희생한 것이고, 그게 바로 우리 모두가 실천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인간적 소망들을 채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희생해야 한다.”

데이는 29살이던 1927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당시 그녀는 포스터 배터햄과 사실혼 상태였고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헤네시의 어머니인 타마였다. 데이는 가톨릭을 선택하면서 (강한 무신론자였던) 배터햄과 헤어졌다.

헤네시는 할머니는 “절대로” 교회 가르침과 교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전쟁과 가난이 서로 연결돼 있음에 대해 말했고, 주교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걱정했다. 하지만 교리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도 그것을 내 지침으로 삼으려 노력할 뿐이다.”

데이가 교회 가르침을 엄격히 따랐던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헤네시 혼자만이 아니다.

전직 사제로서 덴버에 있는 레지스 대학에서 종교학과 가톨릭학을 가르치는 마이클 백스터는 가톨릭일꾼 운동은 구조 자체에 자유와 권위 사이의 갈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갈등은 이러저러한 크고 작은 문제에 다 작용한다.

백스터는 “한 (가톨릭일꾼) 공동체에서 누가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갈등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처리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손님이나 동료 일꾼 보고 떠나라고 할 권한이 있는가? 그렇다면 언제? 그리고 왜?”

“도러시는 이 긴장에 관해 썼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애를 썼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평화주의 문제가 가장 유명하다. 가톨릭일꾼 공동체 구성원들 가운데는 그녀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그녀가 이 긴장에서 권위의 편(제도교회의 전쟁 참여 입장)을 너무 비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현세 문제에서는 평신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근거 위에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했다. 하지만 도러시가 근거로 삼은 자유를 지금 우리는 교리와 전례 문제, 누가 미사를 집전하느냐를 포함-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여성 사제 서품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지지하고, 특히 몰상식하고 무자비한 금지 같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일을 당했던 내가 아는 여성들을 지지한다. 하지만 이것은 나 또는 그 누군가가 교회와 상관없이 그리고 거역하며 결정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백스터는 자기는 “교회가 여성 서품을 소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동떨어진 존재가 될까” 두렵지만, “자기와 다른 시대와 공간의 가톨릭 공동체들과의 대화는 제 내키는 대로 젖혀 두는 분파들, 이익단체들, 끼리끼리 모인 개인들로 분해되는 것”이 더 걱정된다고 했다. “달리 말해, 내가 염려하는 것은 교회 분열(schism, 이교)이다. 우리 공동체들이 전체(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 줄기에서 잘린 가지가 되는 것. 그래서 나는 우리가 이 문제를 철저히 논한 뒤 모두 함께 미사에 가고, 그 미사는 지금으로서는 남성이 집전하는 미사이고, 그럼에도 가까운 장래에 여성 부제가 보좌하는 미사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코데이로는 백스터와는 다른 것을 두려워한다. 미국에서 가톨릭교회가 정통성을 둘러싼 내부 논쟁이 아니라 교회가 (백스터가 보기에) “교회와 국가의 혼인”에 대한 논쟁 때문에 세상에 걸맞지 않는 존재가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이면서 아직까지 검토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흔히 말하듯) 교회가 미국 사회와 어울리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제도 가톨릭교회가 로마 가톨릭적이라기보다는 미국적이 아닌가, 비폭력적인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가려고 정직하게 노력하기보다는 미 제국의 신의 편에 -부와 권력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존재적 문제다.

그는 만약 도러시가 지금 살아 있어서 “미국 가톨릭교회가 오늘날 친 전쟁, 친 미제국 교회로 바뀌는 것을 본다면, 우리가 여성 서품을 지지하려 하는 것을 단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 1972년 도러시 데이. (이미지 출처 = NCR)
백스터는 일부 가톨릭일꾼 운동가들은 “우리는 ‘도러시에게 맡기자’라던 시절이 지났다고 믿을 것이며, 나도 거기에 어떤 뜻에서는 동의한다”고 했다. “그것은 도러시가 어떤 일의 결정 방식이라고 생각하던 것과는 꼭 같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가능한 최대한 교회 안에서 순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 서품은 “도러시가 헌신했던 전쟁이나 가난 등과 같은 차원의 양심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여성 서품에 대해, 헤네시는 자기는 할머니에게서 두 가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여성은 사제가 되기에는 너무 바쁘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아마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도러시 데이의 일생을 연구하는 로버트 엘스버그는 교회와 사회 안에서 논란이 많은 문제들에 대해 도러시가 지금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추측은 “별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환희의 의무: 도러시 데이의 일기”의 편집자다. “도러시 데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녀는 119가 될 것이다. 그녀가 1897년이 아니라 1940년대에 태어났다면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도러시 데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성 아우구스티노가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다면 그는 무력으로 이교도를 교정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는 데이는 교회의 어떠한 명시적 가르침에도 반대한 적이 없다면서, “지금 (교회가) 그녀의 시성과 관련해 그것도 의심할 여지없이 고려 사항이다. 모든 시성 후보가 그렇듯이.”라고 말했다.

여성 서품에 관해, 엘스버그는 “아마도 이것은 도러시 데이라면 이들 (가톨릭일꾼) 공동체들과 의견이 달랐을 것이다. - 여성 서품의 선익에 대해서가 아니라(그녀는 아마도 무조건 반대하는 이들과 달리 환영했을 것이다.) - 전례와 교회법, 그리고 신앙과 교리를 다루는 문제에 대해 교회와 (공개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는 가톨릭일꾼 운동이 그런 문제들에 흠이 없도록 아주 신경 썼다. 그래서 사회 문제에 대해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그녀가 살았을 때라면 여성 서품 문제에 대해 반대했으리라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녀는 그런 문제들에 관해 교회 당국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아주 세심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사회 문제에 관해 교계제도에 도전하는 데 방해되지는 않았다. 묘지 일꾼들의 파업을 지지하면서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피켓 시위를 하던 일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서로 자기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그녀의 권위를 불러오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고 본다. 그녀는 아예 그런 문제에 부닥치지 않았다.”

(편집자 주- 1949년 초 겨울, 미국 위스콘신 주 캘거리 대교구에 고용된 교회묘지 일꾼 약 250명이 주 48시간 노동제서 40시간제로 바꿀 것과 시급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교구장인 스펠만 추기경은 그들의 요구를 여러 차례 거부했다. 파업이 몇 달이나 이어지면서, 방수포에 싸인 관들이 거의 1200개나 매장되지 않고 쌓였다. 이에 스펠만 추기경은 신학생들을 동원해 관을 묻음으로써 (불법으로) 파업을 파괴하려 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이 묘지 노조를 장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도러시 데이는 3월에 이 파업을 옹호하고, 스펠만 추기경이 노조 측과 만나 “요구를 들어 주고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발을 씻어 주라“고 요구했다. 이 파업은 이 노조가 자기가 소속된 상급 노조를 ”공산주의“ 노조에서 다른 노조(AFL)로 변경한 뒤에야 대교구가 임금인상률을 원래의 3퍼센트에서 8퍼센트로 올리고 근로시간은 그대로 48시간으로 하는 것으로 타결되었다.)

“지금 그녀라면 여성 사제를 반대할 것이라고 하는 쪽이든 찬성할 것이라 하는 쪽이든, 그녀가 실제 부닥치지 않았던 문제에 관해 자기 입장을 옹호하려고 그녀를 이용할 뿐이다.”

(패트릭 오닐은 오랫동안 <NCR>에 기고해 왔으며, 노스캐롤라이나 주 가너에 있는 “찰스 멀로랜드 신부 가톨릭일꾼의 집”의 공동창립자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news/justice/des-moines-catholic-worker-talks-womens-ord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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