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주의 없앨 열쇠

(짐 퍼셀)

우리가 지금의 가톨릭교회 안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권력과 권한의 재분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여성 부제를 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으로는 이 긴요한 조직적 혁명을 이루기에 결코 충분하지 않다.

물론, 부제직을 여성에게 개방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아주 필요한 변화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여성 부제라고 해도 여전히 여성은 사제들 다음의 “2등” 지위 그대로다.

그런 지적을 한 이들 가운데는 운동장을 평평하게 하려면 여성이 서품된 사제가 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성을 사제로 서품하기를 지지하면서도, 한 가지 다르고 더 중요한 변화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법을 개정해서 본당의 “사목자”(pastor)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굳이 사제가 될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자격 있는 평신도 남녀와 남녀 부제들에게 우리 신앙 공동체들을 이끌 진정한 권력과 권한을 주라.

이러한 변화가 이뤄지면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따른다. 사제의 역할과 사목자의 역할이 구분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옳게 개탄하는 바 성직주의 문화가 크게 변할 것이다.

아마 더 의미 깊은 것은 사목적 지도자가 성체성사 집전에 중점을 두던 데서 다시금 하느님왕국의 선포(preach)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1970년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거룩한 공의회)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한 일부로서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미사 경본 총지침”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제1장(첫머리)에서 “미사 거행은.... 세계 교회와 지역 교회 그리고 신자 각자에게 그리스도교 삶 전체의 중심이다.”라고 말한다.

1965년에 서품된 젊은 사제이던 나는 당시 미사와 미사가 교회 생활 안에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이 설명을 받아 안았다. 1972년에 내 평생에 걸친 사랑과 혼인하기 위해 사제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나는 계속해서 미사를 내 영적 생활의 중심으로 봤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지난 10년 새, 나의 관점은 크게 변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직무에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것보다 복음 선포에 더 중점이 있었다.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해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가기까지 사이에 특별한 식사자리를 주재한 기록은 오직 두 번뿐이다. 최후의 만찬과 부활 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을 만났을 때다.

신약의 다른 서간문 등에도 성체성사의 위치에 대한 나의 관점이 변한 근거들이 보인다.

* 예수는 하느님나라가 온다고 선포했지 그 자신을 선포하지 않았다.(이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실제적으로 현존”한다고 강조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고, 이 실제적 현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된 것이다.)

* 예수는 제자들에게 “우리 아버지”를 가르쳤지 어떻게 “성체성사를 집전한다”거나 “미사를 봉헌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 요한 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을 묘사할 때, 거기에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언급은 없다. 그리고 “발씻김”은 섬기는 지도자와 제자들이 이루는 하느님나라에 관한 것이다.

*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즉 일용할 빵을 포함해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다. 빵을 특별히 쪼개는 의식은 이러한 삶의 작은 한 조각일 뿐이었다.

* 부제들이 만들어진 것은 사도들이 성체성사를 더 자주 집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사제들”)이 말씀을 선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제들은 병자와 가난한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요구받았다.

▲ (이미지 출처 = NCR)

믿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내 삶은 하나의 신앙 여정이다. 성체성사는 내 여행길에 아주 특별한 음식이지만, 이 여행이 우선이지 그 음식이 우선이 아니다. 내 신앙의 여정에는 많은 영적 음식의 원천이 있고, 우리에게는 지도자로서 훌륭한 자질이 있어서 이 여행을 도와 줄 자격이 있는 많은 여성이 있다.

미국교회의 성인교리 프로그램(RCIA)은 좋은 패러다임이다. 이 프로그램은 성인을 위한 것으로 성체성사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첫영성체를 받기 앞과 뒤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이 여행과 관련된 것이고, 성령이 어떠한가 하는 것 또한 이 여행을 위한 에너지/자양물의 한 원천이다. 세례, 견진, 그리고 성체성사의 성사신학을 “이 여행을 위한 양식”으로서 대신 때에 맞춘 한 순간으로서 초점을 두는 것은 잘못이다.
얼마나 많은 성인교리 프로그램을 여성이 주도하는가? 이들 여성(그리고 많은 남성 평신도)은 자신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끌 탈렌트를 갖고 있음을 이미 증명해 왔다.

그렇다면 위에서 내가 정리한 관점과 성체성사를 그리스도교 생활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일반적인 이해를 우리는 어떻게 화합하는가? 왜 이 여행을 위한 양식으로서의 파스카 신비의 기념을 강조하는 데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실제적 현존”, “실체 변화”, 그리고 서품된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사효적으로(ex opere operato) 만드는(confect) 능력을 강조하는 데로 전환되었는가?

이 전환은 교회가 서품된 사제, 그리고 그 사제와 성체성사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바에서 있었던 발전과 변화(그리고 성직주의의 발전과 이 변화에 수반된 서품된 성직자로의 권력 집중화)들의 일부로 이뤄졌던 것이며, 복음 선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약해짐과 병행했던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꾸는 “힘”은 아주 매혹적이고, 너무 많은 사제들은 이 힘에 가려진 바 하느님나라를 명실상부하게 선포하는 중요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 힘의 교계제도는 지난 2000년간 발전되어 왔고 중세 이래 거의 변하지 않았다. 사실, 그 교황과 주교들이라는 군주정 구조는 황제와 왕, 그리고 봉건영주들이라는 중세의 정치 구조를 거울처럼 옮긴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교회로서, 복음적 생활을 실천하며 사는 데 헌신하는 제자들을 모으고 양성할 필요를 더 강조하고, 더 많은 독신 남성을 사제직에 서품할 필요를 덜 강조해야 할 때다. 신실한 신앙을 지닌 많은 여성이 이러한 제자들을 모으고 양성하는 일을 이끌어나갈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무엇보다도 본당 차원에서 일궈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신앙 여정의 양성에서 내용과 방식을 사람들에게 참된 제자가 되라고 촉구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선포하는 역할들에 최우선을 두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양성은 현재처럼 “미사를 집전하고”, “죄를 용서하고”, “신앙의 유산”을 전달할 권한을 강조하는 것과 반대로, 신앙 공동체들을 이끄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들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사제와 부제들이 우리 신앙 공동체들의 평신도 지도자들과 나란히 공부하며 영적으로 성장한다면 성직주의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상상해 보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주의와 출세주의를 비판하고 모든 이, 특히 가난한 이들의 삶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는 복음적 소명을 강조해 왔고 이는 마땅히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를 비롯해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의 현재 권력구조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평화와 정의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제자됨으로 부르는 교회의 사명을 강조하는 데로 우리가 복귀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노력들은 우리와 세상이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 오늘날 요구하는 바에 크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교회 안에는 어떤 큰 변화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짐 퍼셀은 <NCR> 이사이며, 여러 교회 사회복지 기관에서 일했다. 그는 샌타클래라 대학 부총장을 지냈으며 최근 은퇴했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news/spirituality/focus-preaching-kingdom-key-ending-cleri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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