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교회] 5월 3일자 1017호 <평화신문>과 2646호 <가톨릭신문>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2004년에 <간추린 사회교리>를 펴낸 이후 1년만인 2005년 한국교회는 아시아권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번역 출간하였다. 그 후 이 책은 교우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하여 <더 간추린 사회교리>, <다시 간추린 사회교리> 및 소공동체용 교재로까지 발간된 바 있다. 물론 교계신문들도 사회교리에 대해 시시때때로 보도했었다.

<간추린 사회교리>는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최초의 사회회칙인 <새로운 사태>를 반포한 이래 최근까지 역대 교황들이 반포한 사회회칙, 메시지, 교황문서, 교황권고, 담화, 연설문, 자의교서 등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관점에서 정리한 하나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임과 동시에 실천과제를 지니고 있다.

5월 1일은 한국교회 수호성인인 성 요셉 대축일이었다. 흔히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을 성모 마리아로 국한해서 생각하기 쉬우나 우리는 보다 든든한(?) 두 분의 공동 수호성인이 지켜주는 교회다. 특별히 교회는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 요셉 대축일’이라 부른다. 교계신문들은 5월 3일 성소주일 의미에 치우쳐 ‘노동절’과 함께 한국교회 수호성인인 ‘성 요셉’도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린 느낌이다.

작년 이쯤에도 교계신문들은 노동사목이 아닌 근로자사목을 보도하더니 올해는 더욱 인색하게 흘려버렸다. 그만큼 노동의 자리와 노동자들의 삶을 쳐다보는 언론과 교회의 눈이 더 야박해진 것은 아닐까? 중요하다고 말하던 <사회교리>의 자리는 늘 정의평화위원회가 발간한 책 안에 머무르고 있는 듯하다.

자료에 남아있는 한 교계신문의 보도기사를 인용한다. “1955년 교황 비오 12세가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 요셉 대축일’로 제정하면서 교회 안에서도 뜻있는 기념일로 자리잡아온 ‘노동절’은 신자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그래서 달력에만 존재하는 날이다. ‘근로자’라는 말이 ‘노동’이나 ‘노동자’라는 말보다 익숙한 현실은 시대의 징표에 민감하기보다 어느새 일상에 길들여져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갈수록 그 의미가 희석되고 있는 ‘노동하는 삶’의 중요성을 되돌아보는 것은 곧 노동의 신성함을 회복하고 사회정의를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가톨릭신문> 2002. 4. 28: <간추린 사회교리> 소공동체용 교재 79쪽) 한 마디로 명문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시 신문이 말하던 “‘근로자’라는 말이 ‘노동’이나 ‘노동자’라는 말보다 익숙한 현실”과 “갈수록 그 의미가 희석되고 있는 ‘노동하는 삶’”이며. “노동의 신성함을 회복하고 사회정의를 다지는 일”에 앞장서야 하는 당사자는 그리스도인 모두인가, 교회언론인가? 교회인가? 아니면 지나가는 김 서방인가? 자신은 혀가 짧아 ‘바담 풍’이라고 하지만 독자와 교우들은 ‘바람 풍’이라고 독려하는 소리는 공허한 법이다.

이번 주 교계신문을 일별하자. <평화신문>은 노동절, 아니 달력 표현으로 ‘근로자의 날’을 맞아 근로자 혹은 노동관련 소식은 없지만 ‘사람들’란을 이용하여 18면에 ‘가톨릭 노동계의 대부’로 불린다는 미국인 도요안신부를 소개하였다. 그의 50년에 걸친 한국에서의 수도생활을 통한 다양한 노동현장의 사례와 함께 현재 동정을 기사화 했다. 그런가하면 <가톨릭신문>은 2면 단신으로 처리된 ‘인천교구 제8회 노동자주일 행사’가 전부였다. 세계 어느 지역교회보다도 한국교회가 중하게 여기는 사제직, 수도자, 선교사, 재속회, 종신부제직등 특별히 하느님께 봉헌되는 성소를 공동체가 기억하고 함께 기도하는 날인 성소주일(부활 제4주일)과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 요셉 대축일의 등급을 기계적 기사 균형으로 보도할 수는 없지만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가치’와 교회관심이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평화신문>이 인터뷰한 도요안신부가 한국 노동계의 현실을 진단하며 말했다는 “정치색을 띠면 노동운동은 약화된다”는 말이 기사의 부제로 인용되며 독자들에게는 “정치색을 띠는 노동운동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고 전달되었다. 아마도 신문은 그 말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무엇을 의식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현재의 교회관련 사업장 노동조합이 정치색을 띠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누굴 보고 하는 말인가? 혹시나 그것이 민주노총에 대한 것이라면 민주노총은 단순한 협동조합이 아닌 분명한 이익단체이며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단체이다. 그 주장이 옳고 그름은 우리의 주제는 아닐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도요안신부의 말을 그렇게 해석해서 중간제목으로 옮기면 한국에서 50년 고생한 미국인 수도자신부에게 폐 끼치는 일이다.

진정으로 노동의 어려움과 노동자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려면 교계신문 종사자들이 <사회교리>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사회교리 책이 나왔다는 보도가 아니라 사회교리적인 삶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노동사목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보고자 했던, 모시고자 했던 노동과 노동자가 더 귀한 것이다. 노동사목자는 성소로 불림을 받는 일이지만 불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려고 불렸는지가 더 핵심일 수 있다. 하늘은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우리의 일을 쳐다보신다. 두 신문사의 노동조합은 안녕하신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