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8월 21일(연중 제21주일) 루카 13,22-30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다.(13,22 참조) 구원의 여부에 대한 질문을 들고 예수에게 다가선 그 사람, 그의 질문 속엔 ‘적다’라는 형용사가 등장한다. 곧장 우리의 눈을 28절과 29절로 옮겨 보자. 거기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등장하고 ‘모든’ 예언자까지 언급되며 나아가 사방 천지에서 하느님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는 이들 또한 덧붙여진다. 요컨대, 구원은 보편적이다. (오늘 복음 앞서 하느님나라도 어마어마하게 확장성을 가진 겨자씨와 누룩으로 설명되었다) 구원받을 사람은 많다. ‘적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그 사람은 구원을 재단하여 계산한다. 그 사람에게 구원은 구원받을 만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고, 뽑힌 이들에게 어울리는 선물이며, 개나 소나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특권층의 혜택 정도로 인식된 것은 아닐까. 이 생각이 지나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 개연성이 있다. ‘적다’라는 표현 안에는 분명 갈라 놓고 구별하며, 그리하여 취사 선택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예수 역시 문을 두고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 ‘좁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한다. 그런데, 예수의 ‘좁음’은 대개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 사뭇 다르다. 이를테면, ’좁은 것’을 ‘넓은 것’에 반하는 개념으로 오늘 복음은 이해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고자 하는 ‘문’이 좁은 것이되, 문이 작아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문의 양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문이 작다, 넓다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 그 문은 많은 사람들의 욕망의 투사를 가리킨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많은 사람들이 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그 문은 많은 사람의 욕망의 투사를 가리킨다. 달리 표현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 그것이 구원이든, 행복이든, 성공이든, 그 무엇이 되었건 ‘문’은 사람들의 원의를 담고 있다. 예수는 그들의 원의가 꺾어질 것이라 분명 말한다.(24절) 26절은 꺾여야 할 그 의지를 다르게 풀어 놓는다.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주님과 먹고 마셨고, 내가 생각하는 주님의 말과 행동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자리에 ‘나’라는 존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나 할까.

‘내’가 중심인 구원 개념은 ‘너’를 배제시킨다. 구원은 상호 관계 안에 이루어지는 창조적 배려다. (루카 9,26; 12,8-9 참조) 내가 아무리 잘해도 네가 받아주질 않거나 거부하면 어쩔 수 없는 게 구원의 논리다. 예수의 비유 중에 등장하는 집주인은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한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27절) 이 말은 각자 제 삶의 본디 자리를 캐묻는 말이다. 본디 자리를 캐묻는 것, 그것은 본래 모습을 챙기는 것이며, 다른 말로 회개라고 한다.(13,3.5) 회개는 ‘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본디 나를 찾는 회복의 여정이어야 한다.

본래 내 모습을 찾는 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많은 이가 찾고자 하지만, 실은 많은 것을 해대느라 많은 이가 자기를 잃어간다. 일로써, 명예로써, 권력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이들, 그들은 분명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 한다. 좁은 문은 넓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넓은데도 내가 그 문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좁은 게 아닐까. 차고 넘치는 것에 익숙해서, 차고 넘쳐야 한다는 당위를 만들게 되고, 그래서 나에겐 가난이 가난할 수밖에 없어서 구원의 넓디 넓은 문은 그토록 좁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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