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8월 21일(연중 제21주일) 루카 13,22-30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열어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은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달라는 사람들은 주인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기들의 동네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를 보았거나, 함께 먹고 마신 사실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사람의 삶의 빛깔을 보고, 그 사람의 기원, 곧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삶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인류 역사가 있으면서부터 사람들은 신에 대해 줄곧 상상하였습니다. 유능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을 모든 일에 유능한 분, 그래서 전능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보고 신을 높은 분, 곧 지고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이 법을 주고, 그 법을 따라 심판하여, 잘 지킨 사람에게 상을 주고 못 지킨 사람에게는 벌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높고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 신에게도 제물을 봉헌해야 한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신을 가르치면서 신의 이름으로 법을 주고 제물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사람들이 상상한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실천이 있는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고, 그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을 그 본연의 빛깔 따라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분을 맞아들이는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1,12-13) 예수를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동기로 실천하는 삶의 빛깔이 있다는 말입니다.

2세기 어느 신앙인은 하느님에게서 난 생명이 하는 실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이웃을 탄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재산을 축적하며,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지도 않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도 아닙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자, 이웃에게 베푸는 자,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주는 자, 이런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진실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디오그네투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실천이 삶의 어떤 빛깔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 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듯이 우리도 베풀어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사람의 삶의 빛깔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가 상상해온 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높고 지엄하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 그 아들과 교섭을 잘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곧 일상생활의 불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좁은 문.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재물과 지위를 얻고, 건강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좁은 문이라 불렸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물과 지위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일은 아무나 알아듣고 행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연계하여 생각합니다. 그것을 얻으면, 하느님이 우리 편에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잃으면, 하느님이 떠나셨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은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혼동하지 않는 사람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인간이면, 모두가 탐하는 재물과 기적으로 통하는 문은 넓은 문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빛깔을 가진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생명을 살자는 운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합니다. 그런 사람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에게 빌붙어서 기적과 재물을 얻어내어 잘 살아보겠다는 수작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웃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득이 아니라 실을 갖다 주는 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는, 좁은 문이 열어 주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해 열려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득에 목숨을 걸지 않고, 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좁은 문이 열어 주는 길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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