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36]

이미 교회를 떠난 분을 포함하여 냉담으로 추정되는 신자들을 전체 신자의 70퍼센트라 보면 이 가운데 1/3은 부모님 덕에 영세 받은 자녀들일 가능성이 높다.

교회 안에서 시행된 사회조사 자료들에서는 대략 전체 신자의 65-70퍼센트 정도가 ‘가족 모두가 신자’인 가정(이하 신자 가정)으로 나타난다. 이 가정은 ‘부모 모두’ 또는 ‘부모 가운데 한 명’ 특히, 엄마가 열심히 해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신경을 쓰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뉜다. 아마 후자가 훨씬 더 많을 터이다. 후자가 더 많을 것이라 추정하는 이유는 이렇다. ‘신자 가정’이라 하더라도 몇 대를 물려 신앙생활을 하는 ‘구 교우’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이 있다. 구 교우 가정에는 여러 세대를 거치며 형성된 가정의 신앙문화, 즉 몸에 익힌 가톨릭적 생활 양식이 존재한다.

최근 신자가 된 가정들은 이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전체 신자의 70퍼센트 정도가 최근 30년 안에 입교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성인이 되어 입교하였다. 이들은 ‘신자 가정’을 이뤘음에도 신앙교육에는 소홀한 경향을 보인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녀를 주일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신앙 교육의 의무를 대신한다. 물론 이 정도도 ‘높은 열성’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부모 비율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다. 일례로 ‘2015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서 해당 연령대 신자 총수 대비 주일학교 등록학생 수 비율은 초등부가 30퍼센트 수준, 중등부가 15퍼센트 이내. 고등부는 8퍼센트 이하 수준이다. 초등부까지는 신경을 쓰다 중학교로 올라가면 반 토막, 고등학교로 올라가면 다시 반 토막을 만드는 양상이다.

대부분의 자녀 세대는 신앙교육에 소극적인 부모의 방치, 자신의 의사가 합쳐져 냉담에 들어가게 된다. 게다가 한국사회는 이들에게 ‘공부’라는 합법적 명분을 제공한다. 신자 부모들조차 이 ‘거대하고 그럴 듯한 명분’을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이 분위기가 자연스레 더 조장된다. 신자 가정이 아닌 ‘가족의 일부만 신자’인 경우는 신앙을 지지할 근거와 토대가 이 보다 더 빈약하다. 혼자만 신자인 ‘청소년’의 경우에는 거의 지지해 줄 토대가 없다. 이렇게 의도적으로든 혹은 불가피하게든 ‘방치된 시기’에 속해 있는 신자들이 거대한 냉담 층을 형성한다.

얼마 전 ‘군대’가 ‘냉담자 양산 기관’으로 기능한다고 했는데 이 측면도 영향을 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 가운데 제대 후 본당으로 교적을 옮기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 냉담자가 되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경제 불황으로 청년들이 교회를 더 멀리하면서 냉담 층이 더 두터워졌다.

이번에는 이와 관련된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한다.

A는 남자이고 현재 대학생이다. 그는 신자인 부모한테 태어나 백일 때 영세하였다. 어릴 때는 부모 손에 이끌려 주일미사에 자주 참례하였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그렇게 보냈다. 그러나 한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 일이 내키지 않았다. 마침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주일학교 등록을 놓고 부모님과 담판을 벌였다.

그는 완강하게 주일학교 등록을 거부하였다. 부모의 회유, 협박에도 끝내 주일학교 등록을 하지 않았다. 주일미사에도 부모님을 쫓아가지 않았다. 이후 성당에 간 적이라곤 가족의 장례미사 때뿐이었다. 부모님은 첫 영성체라도 시키고자 했는데 역시 거부하였다. 특별히 그리 행동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성당에 가는 것이 지루하고 싫었을 뿐이다.

사춘기 때는 자신의 허락 없이 영세를 시켰다고 부모님께 항의했다. 이때부터는 자기 논리를 세워 부모님과 신의 존재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부모님은 적어도 혼인은 성당에서 해야 한다는 마지노선을 정해 놓으신 상태다. 그런데 들어드릴지 아닐지는 아직 반반이다. 그나마 이 반반도 크게 마음을 쓴 것이다. 부모님이 나이가 드셨고 유언이니 자신한테 부탁을 들어달라고 버티면 거부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다.

대학에 와서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들을 여러 무신론자들의 학설을 통해 더 강화시켰다. 그 결과 이제는 가톨릭은 물론 모든 종교가 무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성당에 다시 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 유아 세례. (이미지 출처 = flickr.com)

다음은 청소년기에 입교하여 냉담하게 된 여성의 경우다.

B는 50대 초반에 대학생 딸 하나를 둔 주부다. 부업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집에서는 그녀 혼자만 신자다.

그녀는 전북의 면 단위 동네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해 고등학교 때 전북에서 가장 큰 도시로 유학을 왔다. 마침 그녀가 자취하던 곳 근처에 오래된 성당이 있었다. 이국적 건축 양식이 멋진 곳이었다. 이 건물과 주변이 어우러진 경관과 성당의 분위기를 아주 좋아했다. 가끔 주말에 산책 가서 보게 되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모습도 행복해 보였다. 외로웠던 그녀에겐 천국으로 보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같은 반 친구가 성당을 다니고 있어 이 친구의 안내로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영세를 받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지런히 다녔다. 졸업 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두 번째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울 생활을 할 때는 아는 사람이 없어 성당에 잘 나가질 못했다. 학생운동 하는 서클에 가입하고 나서는 성당에 발을 들여 놓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성당과 천주교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취업을 해 경제활동을 하였고 신자 아닌 남자와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남편은 자긴 성당에 안 다녀도 아내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분위기라 딸을 낳을 때 영세시키면서 다시 나가 볼 생각도 했었는데 간절하지 않다 보니 결단을 내리지 못 하였다. 이렇게 마음은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는 이렇게 사는 데 익숙해져 신앙생활을 재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상태다. 그러나 이제 끝이라고 단언하고 싶지는 않다.

청소년기때 영세를 하면 한동안 쉬다 40대에 신앙생활을 재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이 연령대가 인생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일 터이다. 이렇게 복귀하고 나면 배우자를 설득해 영세를 시키고, 자녀들을 영세시킬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래서 어떤 사목자는 20-30대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통계들을 보면 이 막연한 기대가 난망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흘러도 40대의 복귀율이 높아지지 않고 있어서다. 입교 연령층도 50대 이상에서만 높아질 뿐 40대 이하는 인구절벽에 가깝다. 아마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거대한 변화의 영향이리라.

사족 하나. 대수천에서는 교회의 사회참여 때문에 420만이 냉담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플래카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교회를 정치선전장 만들어 540만 신자 중 420만 냉담자 만든 주교회의 해산하라.”이다.

그러나 이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서 ‘냉담자’ 항목을 뺀 것이 겨우 몇 년 전이다. 냉담자 통계에서는 늘 전체 신자의 25-30퍼센트가 냉담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그들이 요즘 일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하는 시기와 아무 상관없는 1999년에도 전체 신자의 31.7퍼센트(약 125만 명)가 냉담자였다.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과 같은 대규모 행사로 신자 몰이를 하였던 1984년에도 냉담비율이 23.4퍼센트였다. 여기에 방금 예를 든 경우까지를 포함하면 적어도 전체 신자의 50퍼센트는 늘 냉담 상태에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개신교도 냉담자 증가(이들은 가나안 성도라고 부른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잘 알고 말씀하시는 게 좋겠다.

오히려 대수천 회원들이 선택하는 비교회적 비복음적 방법이 냉담을 촉진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사실 남아 있는 신자들은 바보라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르면 잠자코 계시거나, 못 참으시겠으면 여러분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한기총 소속 교회로 옮기시는 게 좋겠다. 거기 가면 늘 자신들의 생각과 같은 ‘은혜로운 말씀’을 듣게 되실 테니까. 솔직히 우리는 여러분들 같이 이데올로기를 신앙으로 삼는 이들에게 교회 쇄신을 맡기고 싶지 않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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