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8월 14일(연중 제20주일) 루카 12,49-53

오늘 복음의 첫 단어는 ‘불’이다.(그리스어 버전이 그렇다) 불이 다른 무엇보다 뚜렷이 강조되는 문장구조다. 루카의 ‘불’은 서로 상반된 두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종말론적 심판을 가리키고(루카 12,35-48) 다른 하나는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의 시대를 가리킨다.(사도 2,3) 물론 오늘 복음의 전후 맥락을 따져 보면 전자에 가까운 의미로 ‘불’을 이해해야 한다. ‘불’, 그러니까 심판은 세상에 주어진다. 예수는 세상이 불에 휩싸이고 타오르길 원한다. 뒤집어 말하면 세상이 아직 불에 휩싸이지 않았단 말이다. 그 전에 오늘 복음은 예수의 ‘세례’를 언급한다. 불과 더불어 맥을 같이 하는 단어가 ‘세례’다.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세례를 환난에 휩싸인 상태로 이해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가 받을 세례를 두고 마르코는 마셔야 할 ‘잔’으로 언급했는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이다.(마르 10,38-39) 세상은 하느님을 거부했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상처 입고 억압당하고 짓눌렸다.(창세 3,15; 이사 53) 이게 성경이 말하는 영광의 구세사 이면에 숨겨진 슬픈 진리다. 불로 세상이 이미 타올랐다면, 세상은 하느님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을 테고, 저만의 이익으로 서로 헐뜯지 않았을 텐데, 아직 우린 예수를 더 죽여야 하고, 그를 믿는 이를 더 짓눌러야 하는 시대를 사는가 보다.

▲ 자기 분열, 비겁함, 외면.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어찌 보면 예수의 생애 전부가 세례를 위해, 죽음을 위해 바쳐진 억압의 세월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피땀을 흘리는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는 그 세월의 고단함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마르 14,32-42) 단순히 예수의 참혹하고 처절한 희생을 강조하자는 게 아니다. 예수가 자신의 입으로 세상에 불을 지르고, 세례를 받고, 짓눌릴 것이라고 말하는 건, 그것이 이미 정해진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는 ‘반드시’ 그리 아프고 힘든 시간을 하느님의 뜻을 위해 보내야 한다.(루카 9,22)

예수로 인해 분열이 오는 건 하느님의 뜻이고 예수의 원의다. 대개 사람은 고통을 거부하므로, 대개 사람은 얼굴 붉히는 것을 혐오하므로 예수의 불을, 그로 인한 분열을 끔찍히도 싫어한다. 예수는 좋은 가르침을 줬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인류 역사가 20세기에서야 조금씩 깨달은 인간 존엄과 연대 의식, 그리고 사회 정의를 외쳤다는 사실엔 열광하면서, 그로 인해 세상에 분열이 올 수밖에 없는 것엔 입을 닫거나 눈을 가린다. 노동자의 인권, 생태계의 존중, 국제평화와 정의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들을 조롱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라면, 우린 여전히 하느님의 섭리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건 모르긴 몰라도 우리 자신의 분열이고 우리 자신의 비겁함 때문일 게다. 인간 존엄보다는 돈의 계급화를 숭상하기에, 연대보다는 제 이익에 눈이 앞서기에, 사회 정의보다는 내 아들, 내 딸, 내 남편, 내 아내의 출세와 성공이 먼저이기에 세상이 뒤집어지든, 그 세상에 하느님이 무얼 하든 상관없이 살 뿐이다.

미카 예언자는 유대 사회의 타락을 알리는 대목에서 가족 간의 불화를 언급했다.(미카 7,6) 그 불화는 구원의 주님을 기다리는 신호이기도 했다.(미카 7,7) 타락한 세상은 분열을 회피한다. 회피하면 할수록 서로의 생각은 닫히고 적절한 타협만이 난무한다. 그리고 ‘그게 좋다’고, 현실 핑계를 대며 스스로 제 삶을, 우리의 삶을 포기한다. 세상이 불이 나든, 분열이 활개를 치든, 우린 다투어야 한다. 제 목소리를 내질러야 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목에 핏대를 올려야 한다. 입을 다물고 세상 주류의 이해관계에 따라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흘러간 게 예수의 세례, 곧 그의 죽음까지 타협했다. 입을 다물면, 예수가 죽는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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