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8월 14일(연중 제20주일) 루카 12,49-53; 히브 12,1-4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내가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주제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오늘 우리가 사는 문화권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의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불을 지르러 왔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예수가 방화범이 되려 왔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불에다 비유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20,9) 이 말씀을 배경으로 오늘 복음을 이해하면,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불길같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 왔다는 뜻입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10,38)는 예수님의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합니다. 세례는 사람을 물속에 잠그면서 행하는 의례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과거의 삶에 죽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의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데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 자기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주저와 고뇌를 겪으면서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신 다음,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불화를 좋아하신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 시대 유대교의 묵시문학은 세상 종말에 하느님이 가까이 오시면, 가정이 분열되고 사회적 갈등이 고조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심판하실 종말이 가까워지면, 이 세상의 기존 질서들이 모두 무너진다고 믿었습니다.

▲ 십자가에 달린 예수.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오늘 복음이 알리는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은 당신의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올라 온 세상에 전해지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전해야 하는 말씀을 위해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당국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이 고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생존도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많은 곳에서 분열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정 공동체가 찢어지며 가족끼리 반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돌아가셨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들도 가정이 분열되고, 서로 반목하는 아픔을 겪고, 많은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 신앙 초기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초기 신앙인들에게는 분열과 반목의 아픔이 많았습니다. 신앙인이 되어서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사람이 20,000명에 이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혈연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마르코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3,35) 가장 중요한 인연은 형제, 자매, 혹은 아버지, 어머니라는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 되어 살겠다는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과의 인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분열과 반목을 겪으면서 싸워 이기고 군림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다가 그 충실함 때문에 발생한 분열과 반목을 참고 견딥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그리스도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분열과 반목을 자초하거나 조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그것을 참고 견딜 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선교한다는 사람들의 독선적 자세를 만납니다. 그들은 그들만이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승리하고 명령하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오르기를 원하셨고, 그것을 위해 모든 정성을 쏟으셨지만, 그분은 섬기는 모습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 섬김은 곧 사랑이며,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섬김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과 서간들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의 일을 이어받아 어떻게 실천하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히브리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라고 격려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을 바라보고 배웁니다.

교회는 오랜 유럽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그 사회가 준 수직적 권력 구조와 군림하는 인간관계에 익숙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던 초기 신앙인들의 섬김은 희석되고, 봉건 영주 행세를 하는 지도자들이 군림하며 명령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어서 섬기며, 죽어 간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지시하며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지도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럽 중세 세상이 아닙니다. 성전이 웅대하고 화려하다고 감동하여 하느님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중세 유럽의 영주나 왕과 같이 차려입은 고위 성직자들이 있다고 매혹되어 신앙을 받아들일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섬기는 사람이면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가 테살로니카인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살펴보고 좋은 것을 지키시오.”(1테살 5,21).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모든 것을 살펴보고’ 현명함을 잃고, 아집에 살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불길 같이 타오르게 하지 못합니다. 우월감을 가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독야청청하려 하지 말고,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섬김으로 하느님의 아들 됨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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