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7월 31일(연중 제18주일) 루카 12,13-21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유산 분배 문제로 형제 간에 일어난 불화를 해결해 달라고 예수님에게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회에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이야기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큰 창고를 지어 재산을 많이 쌓아 두고, 이제 걱정할 것이 없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 부자는 재산만 있으면, 자기의 인생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산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인간생명이 아니라는 말씀과 더불어 ‘하느님 앞에 부요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편리하고, 사람들로부터도 대우를 받습니다. 물질적으로 편하게 살 수 있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재물을 좋아합니다.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인 양, 오로지 그것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권력에 맛들인 사람은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권력을 가진 자의 비위를 맞춥니다. 친구 배신도 하고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게 행동하면서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탐하는 사람, 오로지 재물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신뢰를 저버리고, 재물만을 위해 사는 추태를 부립니다. 대의를 저버리고 소인배가 된 것이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재물이나 권력에 모든 보람을 걸고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라는 대의를 소중히 생각하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유아독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은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아 살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배워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 담긴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으셨다고 복음서들은 말합니다. 그 시대 마귀 들렸다는 사람은 정신질환자나 간질 환자였습니다. 유대교는 병든 이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고 있다고 가르쳤고, 정신질환자 혹은 간질 환자는 마귀가 들어와서 일으키는 무질서를 겪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며,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사람의 병을 안식일에 고쳐 주었다고 불평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5,17)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재물로써 되는 일이 아니라,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알아 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구걸하는 이를 돕는 벨리제르', 루이 다비드.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그리스도 신앙은 무소유의 경지를 이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는 재산을 상당히 가졌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을 제공한 사람도 부자이면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서(27,57)는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사람이 왔는데 이름은 요셉이고 그 역시 예수의 제자였다.”고 말합니다.

복음서들은 재물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장애물이라서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부자와 걸식하는 라자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16,19-31) 라자로는 부자의 집 문간에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고픔을 면해 보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 있는 빈부의 격차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부각시키는 것은 라자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배고픔을 면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불행이라는 말입니다.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와 나누는 데에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이 있고, 그런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의 재물과 자기의 이웃을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면 갖지 못한 이웃을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인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베풂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면,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2코린 9,11)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은혜로운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실천을 통해 나타나는 데에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것을 은혜롭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인 우리의 형제자매들도 그분의 은혜로움을 체험하도록 우리가 가진 것을 그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유언과 같이 남긴 의례가 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 행하라는 의례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미사라고 부르는 의례입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예수님의 삶이 ‘내어 주고 쏟는’ 나눔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 몸과 그 피에 참여하여 ‘내어 주고 쏟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것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일이고,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 앞에 부요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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