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부산행', 연상호, 2016

'돼지의 왕'(2011)이라는 작품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연상호 감독이 처음 연출한 실사영화다. 애니메이션만 연출하던 감독이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실사영화를 찍는다고 하자 내심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물론 '사이비'(2013)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세계는 훌륭하다. ‘돼지의 왕’의 중학교, ‘사이비’의 수몰 직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기적 인간들의 아비규환 상황은 점점 지옥도를 향해 가는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한 우화다. 그의 이전 영화에는 지독한 악인들이 등장하고, 감당하기 힘들게 엉망이어서 버겁기만 한 사회가 그려져, 실사로 이 장면을 봤다가는 현실감의 무게 때문에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번 영화 장르가 좀비 스릴러라고 하니, “과연 한국에서 전통이 없는 좀비영화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가득 품었다.

▲ '부산행', 연상호, 2016. (이미지 제공 = NEW)
결과는 놀라움 그 자체다. 부산으로 향하는 KTX 안에서 좀비 대 인간이 사투를 벌이는 속도감 있는 액션은 볼거리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가 그리는 인간과 좀비의 세계는 바로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헬조선의 현재이자 미래다. 완벽하게 한국형으로 구현된 좀비들의 아귀 다툼은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 이 공간에 대한 상징으로 그려진 기차 안이다. 속도감으로 팽배한 세상에서 누군가 잡아 먹혀야 내가 잠깐이라도 더 살 수 있는, 그래서 연대나 배려 따위보다는 짓밟고 속이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는, 끝도 없이 비참한 세상이 되어가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춘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가운데, 부산행 열차에 탄 사람들의 이야기다. 석우(공유)와 딸 수안(김수안), 상화(마동석)와 성경(정유미) 부부, 고등학생 영국(최우식)과 진희(안소희), 그리고 노숙자(최귀화)와 중년의 비즈니스맨 용석(김의성)은 감염된 사람들의 공격을 피해 열차 안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좀비, 스릴러, 액션, 재난물이 어우러진 '부산행'은 재난 블록버스터 '괴물'이 예전에 성공했지만 '연리지'와 '감기'로 인해 이내 깨달았던 바, “한국형 재난영화는 정말 힘들구나”하는 생각을 일시에 지워 버린다. 불특정 다수가 목적지의 안전을 알지 못한 채, 오판하고, 서로를 속이고, 미워하고, 혹은 서로를 배려하고, 또 희생하는, 그 많은 행동들이 최악의 위기상황에서 펼쳐진다.

▲ (이미지 제공 = NEW)

여기에 국가는 없다. 믿을 사람은 나 자신, 그리고 가족과 친구지만, 그 가족과 친구 역시 언제 감염되어 괴물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경쟁과 배제냐, 배려와 연대냐의 갈림길에서 악과 선이 나뉜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사건이 펼쳐지고, 인간 대 감염자라는 대결 구도에서 벌어지는 액션이 반복적이라는 한계를 가지지만, 목적지까지 점점 더 증폭되는 액션과 감염자 무리는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렬하다. 이 영화가 가진 큰 미덕과 장점은 공포와 폭력이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고, 고통 그 자체로 보인다는 점이다. 많은 액션 블록버스터가 폭력을 찬양하듯 보일 만큼 액션을 아름답게 그려낸다면, ‘부산행’의 액션은 지금 한국사회의 폭력적 구조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에 더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 (이미지 제공 = NEW)

고통과 공포의 이면에 선한 개인들의 개심과 사랑이 눈물짓게 한다. 어떤 이들은 장면과 음악의 신파적 연출에 대해 말들을 하지만, 그런 따뜻한 사랑과 희생이 없다면 이 거친 세상을 어찌 버티랴. 좀비영화를 보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영화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 심야 상영 부문에 초청되어 해외에 먼저 선을 보였고 호평을 받았다. 한국 블록버스터에 대한 예술영화계에서의 대접이 이례적인데, 이는 이 작품이 단순히 재미를 보장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풍부한 내포적 의미가 있으며 미래의 전망을 밝히는 영화라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 (이미지 제공 = NEW)

또 다른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8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서울역'은 '부산행'의 프리퀄(prequel, 원작 영화에 앞선 사건을 담은 속편)로, 왜 감염자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고 한다. 형제 영화의 공개가 기다려진다. 연상호의 폭주 기관차 같은 질주는 어디까지일지 궁금하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한신대 겸임교수.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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