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22]

▲사진/한상봉

하늘로 올라가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한다.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한다. 승천(昇天)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사도 1,9) 전승에 따르면, 유대인의 먼 조상 에녹도 믿음이 좋았던 탓에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히브 11,5) 

하늘로 올라갔다니 무슨 뜻인가? 풍선이 까마득히 멀어지듯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는 뜻인가? 로케트가 솟구치듯 대기권 밖으로 날아갔다는 말인가? 예수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할 때의 하늘이란 어디이고 또 무엇인가? 그 하늘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까? 

하늘이라는 상징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 신앙이 없던 적은 거의 없다. 우리말 하느님도 ‘하늘’과 ‘님’의 합성어이니, 우리 민족 역시 하늘을 신앙의 대상으로 해온 셈이다. 물론 오늘의 눈으로 엄밀하게 보면 이 때의 하늘은 일종의 상징이다. 유한한 삶에 대한 무한성의 상징이고, 햇빛과 단비를 내려주는 생명의 상징이자, 때로는 천둥과 벼락을 내리는 심판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푸르디 푸른 창공이 머리 위에 펼져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렵고 불변하는 어떤 힘을 느끼기도 했다. 계시와 권위의 원천으로 상상되기도 했다. 

하늘 아닌 곳은 없다 

특히 고대 세계에서는 하늘에 천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천정 너머에 있는 신이 세상을 내려다보며 통치한다고도 믿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다양한 신화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에 천정이 있고 그 천정 너머로 신이 존재한다는 그동안의 이미지가 우주과학적 발견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우주는 무한하며, 인간 삶의 토대인 듯한 이 땅덩어리가 우주 공간 안에서는 정말 먼지 한 점 만도 못할만큼 미미하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우주과학이 증언하고 있다. 동시에 우주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두 발 디디고 사는 이 땅 자체가 곧 하늘이다. 땅 아래도 하늘이고 위도 하늘이다. 내가 그대로 하늘의 한 복판에 있는 셈이다. 도대체 하늘 아닌 곳이 어디란 말인가. 

승천을 탈신화하면 

예수가 승천했다고 전하는 성서의 하늘이란 분명히 저 높은 공간 어딘가를 말하는 것이다. 저 위에 천정과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하늘로 올라갔다는 신화적 양식도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이 땅 마저 사실상 하늘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는 오늘날, 예수가 하늘로 올라갔다거나, 심지어 구름을 타고 다시 오리라는 신화적 표현은 정말 신화적 표현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빛의 속도로 평생을 날아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하늘을 알아가고 있는 오늘날, 하늘은 더 이상 저 높이에 있는 어떤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령 우주 끝에 천정 모양의 하늘이 있다손쳐도 그 어마어마한 우주 끝에서 신적 존재가 하필 한 점 먼지만도 못한 지구로 그것도 손오공마냥 구름을 타고 오리라는 상상은 이제 신화적이다 못해 순진하기까지 하게 느껴진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하늘은 한 번 더 적극적인 ‘탈신화’를 요청한다. 하늘이라는 공간성을 추상화시켜 ‘승천’이라는 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해설하자면, ‘승천’이란 죽은 예수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강력한 신앙의 표현이다. 부활이나 승천은 물론 예수의 모든 사건이 제한적 시공간 안에 머물지 않으며, 죽음마저도 영원한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생명의 사건이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하늘이라는 본향 

그리고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벌어질 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한 첫 사람’(1코린 15,20)이 되신 것이다. 모든 이가 예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이가 하늘의 생명에 온전히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들’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을 갈망”하며 살았다는 성서의 전언(히브 11,16)도 크게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왔다. 지구가 하늘 한 복판에 있는 하늘 자체이듯이, 예수의 승천이라는 말 속에는, 사람이 하느님 안에 있지 않았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가 온전히 보여주었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도 함축적으로 들어있다.

믿음의 조상들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을 갈망했다는 것은 그저 비일상적 환상을 꿈꾸며 살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고향을 향한다고 해서 우주 공간 속으로 로케트를 타고 갈만한 곳에 고향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두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하늘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눈으로 보면 하늘의 한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은 없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땅이 바로 하늘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고향을 갈망한다는 것은 이 땅 위에서 살면서 이 땅의 하늘적 가치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그것이 오늘날 종교적 선각자들이 깨달아가고 있는 하느님의 세계이다. 

누가 하늘을 독점하는가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 그런 식으로 인간의 근본 도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가 두 발 디디고 사는 이 땅 역시 하늘인 마당에, 어찌 하늘과 하늘 아닌 곳을 나누고, 신 있는 곳과 신 없는 곳을 나눌 수 있겠는가. 우주 안에서 보면 먼지 만도 못할 정도로 미미한 이 곳에서 어찌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를 나누고, 신자와 비신자를 차별할 수 있겠는가. 누가 하늘을 독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자든 비신자든,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모두 하늘을 딛고 하늘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삼라만상이 신의 거처이자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이사야 66,1) 누군가 하늘을 독점하고 있는듯한 신화는 이제 다 깨져가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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