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7월 24일(연중 제17주일) 루카 11,1-13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청했고,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십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목욕재계로 준비하라는 말씀도 없고, 제물을 먼저 바치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기도를 위한 자세도, 기도를 위한 복장도 없습니다. 기도를 위한 특별한 장소에 대한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면서 기도는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오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들을 보살피듯이,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계셔서 자녀들이 안심하고 살며 행복하듯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리스도 신앙인도 행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베푸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우리를 배려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옛날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며,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분의 생명을 이어받아 살겠다는 결의도 들어 있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고치고 살리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를 우리가 배워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느님에게 가져와 말씀드리고 그것의 성취를 비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되고, 그 실천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온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하는 항목입니다. 성숙한 자녀는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는 먼저 부모의 뜻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질 것을 빈 다음, 기도는 이어집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는 우리가 노동하여 양식을 얻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위선적 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한 우리는 우리가 노동으로 얻은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이 은혜롭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계속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생각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용서를 실천할 때만,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한다고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용서가 하느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전제조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로우심을 이웃과 함께 기뻐한다는 기도입니다.

▲ 기도.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로써 오늘의 기도는 끝납니다.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겠다는 마음입니다. 유혹에 빠진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루커 22,40).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42) 유혹은 하느님을 생각하지도, 부르지도 않는 삶입니다. 유혹에 빠진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자기 행동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잠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각자 살기 위해 도망칩니다.

이렇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친 예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설명하십니다. 친구를 졸라 대는 사람이 친구에 대해 가진 신뢰심과 같은 신뢰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긍정적 신뢰심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신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듣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명하고, 선언하고, 또 설명하는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그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라고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갇혀서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제대로 된 자녀는 부모를 신뢰합니다. 노예나 종은 주인을 신뢰하지 않고, 주인의 마음에 들어서 혜택을 누릴 궁리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청할 것은 성령이라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그분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조르고, 구하고, 문을 두드려서 얻어 내어야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며,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이 모든 것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큰 신뢰로써 다가가야 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실천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색하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갖고, 명예와 허례허식을 탐하던 우리가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학문과 예술을 익히기 위해 피 말리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우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에 많은 실패를 겪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하느님을 배우겠다는 우리의 마음 안에 성령은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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