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7월 16일(연중 제16주일) 루카 10,38-42

마리아의 몫인가, 마르타의 몫인가.... 무엇이 예수 앞에 가치 있는 것인가 따져 보는 건 오늘 복음 이야기를 접하는 신앙인의 오래된 습관이다. 대개의 해석은 예수의 ‘말’에 대한 경청을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예수의 말만 듣는다고 집안 일을 소홀히 한다거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무시하라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덧붙인다. 예수 역시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마리아에게 ‘좋은 몫’을 선택했다 말한 대목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데 손색이 없다.(10,42)

예수의 말에 강조점을 둔 채 마리아와 마르타의 몫에 대해 따져 보는 해석은 오늘 복음을 예수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걸 방해한다. 예수는 지금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는 그 가르침에 응답하고 있고, 마르타는 여러 일들로 산만하다. 마르타가 예수를 받아들인 건 ‘안주인’으로서 그렇다. 마르타라는 이름은 집주인의 여성형이다. 말하자면, 마르타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안주인’이다. 예수는 마르타의 초대에 응답했고, 마르타는 예수를 시중들면 그만이었다.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마르타는 마르타대로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마르타의 한마디로 시작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10,40) 이 말은 예수를 향한 듯 하지만 실은 마리아를 겨냥한다. 마리아가 마르타가 되라고 하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바벨탑’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모두가 하나의 말과 하나의 사상, 하나의 이름을 자랑스레 여기는 그야말로 ‘하나’가 되는 건, 예수에겐 ‘좋은’ 게 아니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에 앉았다. 발치에 앉은 자세는 가르침을 받는 이의 기본자세다.(루카 8,35; 사도 22,3 참조)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는 예수를 가르치는 이로 여긴 것이고, 예수는 ‘여자’ 마리아를 가르치고자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지속적이고 연속적이다.(‘듣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ἀκούω’의 지속적 의미를 담고 있는 완료형이 사용된다) 예수는 가르쳤고, 마리아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예수시대, 랍비가 여자를 가르치는 건 매우, 매우 드물다!) 가르침을 받았다. 예수와 마리아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디에고 벨라스케스. (1618)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신앙은 자신의 자리에 대한 충실성이다.(히브리어 ‘에매트אֱמֶת’가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 시중을 들든, 말씀을 듣든, 땀 흘리는 일을 하든, 자신의 자리에 충실한 게 신앙이다. 마르타는 자신의 일보다 분위기에 흔들리며 근심했다.('페리스파오περισπάω'는 주위의 일에 마음을 뺏기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르타는 바빴지만 충실하진 못했다.

나는 이 글을 그리스 아테네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쓰고 있다. 앞 좌석에선 간질 증상을 보이는 어여쁜 소녀가 승무원들의 정성어린 보살핌 속에 누워 있고, 뒷 좌석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떠들어 대는 프랑스 꼬마들이 앉아 내 좌석을 자꾸만 흔들어 댄다. 약속된 글을 쓰는 게 충실한가, 산만한 이 순간에 머리를 비우고 몸을 맡기는 게 충실한가.... 인생은 늘 제 삶의 충실성에 대한 자기 해석으로 시끄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다. 나는 지금 시끄러운가, 설레는가 스스로 묻는 게 인생이고 신앙이다.

사족: 오늘은 농민주일이다. 농민주일에 농촌 지역인 성주가 시끄럽다. 사드 배치 때문이다. 프랑스 니스의 테러와 사드 배치는 맥을 같이한다. 제 입장에서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무력은 절대 용납되어선 안 된다. 그건 정의가 아니라 그냥 악할 뿐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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