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형구 신부의 새누리당 윤리위원장 수락 사태에 부쳐

여형구 신부의 새누리당 윤리위원장 내정에 관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보내 온 논평 전문입니다. -편집자 주

지난 7월 13일 새누리당이 서울대교구 소속 여형구 신부를 당 중앙윤리위원장직에 내정했다. 보편교회법(교회법 285조 3항, 287조 2항)과 지역교회법(한국천주교 사목지침 14조 1,2항)은 사제들의 국가 공직 또는 노동조합과 정당 등에서의 "능동적 역할", 직접적 정치참여를 금하고 있다. 물론 교회 관할권자의 허락을 득한 경우는 예외다. 그렇다고 이번 사안의 논쟁점이 교구장의 사전 허락 여부만은 아니겠다. 직권자 동의 없는 단독 행동이라면 사제 개인의 방종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교구장과의 사전 교감 하에 이루어진 일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개인적 일탈에 대한 지탄을 넘어 교구장 개인의 판단력과 교회관, 직권자로서의 자질을 심히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우선 세속권력과 교회가 맺어야 하는 올바른 관계에 대한 무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토록 자주 회자되는 정교분리의 원칙은 사실 분명한 역사적 계보의 구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형성배경을 지니지만 대개 19세기 근대국가의 출현 이후 새롭게 재편된 교권과 속권의 관계를 전제한다. 중세가 마감되고 근대와 함께 출현한 국가는 교회의 후견으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이전 교회가 수행하던 사회적 역할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자 했다. '국가주의'의 거친 요구 앞에 교황들은 스스로 수인을 자처하거나(바티칸의 포로, 비오 9세)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가져올 폐해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하였지만(Vehementer Nos, 프랑스 분리법에 관하여, 비오 10세) 그 본의는 모두 팽창한 국가주의 앞에 교회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저항이었다. 20세기 초반까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일부 국가들에게 유보되었던 교구장 임명에 대한 승인권(placet)은 이러한 역사적 부침의 실례다. 정교분리는 국가의 편에서 교회의 권한 회수를 비롯한 국가주의의 극대화였다면 교회 편에서는 교회의 국가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이다. 교권과 속권의 협착이 가져온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를 일소하고 종교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데 교회는 또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아야 했던가. 이번 사안은 분명 시대착오적 방종이자 무지의 소산이다. 무지도 마땅히 큰 죄다.

당 관계자의 말대로 당적 없이 순수하게 "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인사의 영입"이 그의 임무라도 여전히 참담한 일이다. 일개 정당의 재건이 어찌 사제의 임무일 수 있는가! 과거 송기인 신부나 함세웅 신부가 공익을 목적으로 한 정부 기구(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 참여했을 때 주저 없이 "정치사제"라 핏대 세우던 그 많던 교회의 입들은 이번엔 뭐라 할지 자못 궁금하다. 공익 진작도 아닌 일개 정당에 가담하는 이번 처사엔 또 뭐라 논평할 텐가. 이를 감수하고라도 혹여 꼭 얻어야 할 무엇이라도 있다 두둔할 텐가. 목자는 무릇 복음에 헌신하고 공동선에 이바지해야 하는 공인이다. 특정 정당이나 이념에 대한 복무는 아무리 에둘러도 복음의 순수성에 대한 배반이요 그야말로, 그 말하기 좋아하던 종교의 '중립'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하나는 그 자리가 공익을 위한 정부기구도 아닌 한 정당의 당직이라는 사실이다. 당원가입 여부는 중요치 않다. 당의 지도층에 해당하는 직책의 수락은 아무리 그럴듯한 변명이라도 당의 강령과 가치관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물론 교황들 역시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바오로 6세의 기독교당에 대한 지지) 아예 신자들의 정치참여 자체를 금지하기도(비오 10세)했다. 이러한 조처들은 그러나 당시 파시즘과 같은 정치권력의 광기에 저항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당도 당 나름이라는 것이다. 현 집권여당이 어떤 당인가. 그 실정과 반복음성, 비윤리성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교회의 사람이라면 행위에 앞서 옳고 그름의 복음적 식별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제라면 응당 갖춰야 할 기초적 소양임은 물론이다.

교회는 그 어떤 정치공동체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양자가 만나는 유일한 자리는 모든 사람의 이익, 공동선을 위한 "건전한 협력"이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76항) 오늘의 교회에 유보된 역할은 따라서 이를 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마땅한 비판과 저항, 견제다. 그것이 현실 정치권력이라도 말이다. 사익과 헛된 욕망만을 좇는 권력에 부역하는 것을 어찌 교회의 일이라 하겠는가! 속물적 협착, 세상에 봉사해야할 교회의 고귀한 직무에 대한 배반, 그 무엇보다도 지금껏 온갖 비난과 불편에도 약자들의 눈물을 씻어주던 숭고한 연대들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이번 사태가 사제 개인의 일탈이든 직권자와의 교감의 결과물이든 서울대교구장의 책임은 크다. 이참에 한번 묻고 싶다. 당사자의 말대로, 불의한 정권이나 비상한 시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의 사제단의 정치참여가 시대착오적이며 "비이성적"인 것이었다면(2013년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와의 인터뷰), 불과 그 몇 년 사이 사제가 정당 활동에 뛰어들 만큼 시국이 돌연 비상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약자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위태롭고 그 자체로 비상 아니었던가? 그걸 미처 몰랐다면 영 다른 세상을 산 것이다. 이번 사태는 분명 교회의 주인인 작고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메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들과 연대하는 사제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권력이 내민 손을 덥석 잡는 이 낯 뜨거운 교회를 그들에게, 또 우리 스스로에게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속히 필요한 조처를 강구한 후 반드시 머리 숙여 사과할 일이다.

도대체 교회를 이리도 비참하게 만들 만큼 무엇이 필요했단 말인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파시즘의 광기 앞에 비오 11세 교황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회칙 Non Abbiamo Bisogno, 이탈리아의 가톨릭 액션에 관하여, 1931) 두 사제가, 아니 온 교회가 두고두고 곱씹을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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