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형제들과 모여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편태(鞭笞)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그 주제가 나온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수도생활과 편태는 한때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수도생활과 이미지상 잘 어울리는 사물로 보입니다.

편태 즉, 회초리나 채찍 같은 것은 극기와 고행을 위해 사용되어 온 도구입니다. 혹은 편태를 가지고 치는 행위(flagellation)를 뜻하기도 합니다. 요즘엔 편태라는 도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애써 알아야 할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단지 우리가 이 도구에 대해 무심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시기 전에 채찍질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편태는 고문과 형벌의 도구였지 일상적 삶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런 물건이 유럽에서 11세기 중반 이후에 신앙행위 안으로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3세기에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는 행위를 아예 신앙생활의 중요 행위로 삼은 이들까지 나타났습니다. 육체적 욕망을 죽이고, 절제와 고행, 그리스도의 수난에 더욱 깊이 동참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그들의 태도가 너무 극단적 방향으로 흘러감으로써 나중에는 파문에 이르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절제와 고행을 위해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이후에도 개인적 차원에서 지속되어 왔습니다.

특히 수도생활의 훈육적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려는 의도의 극기, 절제, 고행의 노력은 여전히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수도회에 입회하신 선배 신부님들 중에 몇 분은 편태를 써 보셨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닥의 끈이 달린 채찍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각 끈은 매듭져 있어서 때리면 따끔하기보다는 딱딱한 공으로 얻어 맞는 기분이었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이것으로 양쪽 어깨 주변을 치면 한 번에 공을 여러 개 맞는 기분일 것입니다.

혹은 이런 모양의 편태 대용으로 쐐기풀 다발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쐐기풀 잎사귀는 톱니 모양이라 살이 스치면 아픕니다. 이 풀을 모아 양쪽 어깨 주변을 쳤습니다. 피부를 훑는 고통이 동반됐습니다. 유럽에서 수도원 주변에 쐐기풀이 많았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의도적으로 키웠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편태와 더불어 허리에 감는 벨트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압벨트 비슷하지만 그 끝이 좀 더 뾰족해서 허리 부분을 찌르게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위에 천을 말아서 허리에 차서 생활 속에서 고행을 시도하였습니다.

▲ 편태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수도회에서 수련기를 거치는 동안 편태나 특수 허리띠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은 권장하는 내용도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았으나, 늘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고 싶었던 어떤 선배 형제가 자기 경험을 나눠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형제는 신발에 작은 돌멩이를 집어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돌멩이가 주는 가벼운 자극이나 이물감을 느낄 때마다 짧은 기도를 바쳤던 것이지요. 그런데 신발 속의 돌멩이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돌멩이를 넣은 의미를 의식하는 시간이 점점 드물어졌고 나중엔 귀찮아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더 깊이 동참하려는 의도는 훌륭하고 좋은 것인데 그 의미를 지속적으로 의식하지 못하게 되면 그냥 불편한 무엇이 되거나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는 고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수도생활에서, 우리는 편태라는 도구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자 하는 마음에 일어나는 그분을 향한 사랑의 표현인지, 아니면 인간이 타고났다는 원죄와 나의 나약함을 메꿔 보려는 의도 즉, 보속과 참회의 수단만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편태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거의 온 곳이 비참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밀양, 강정, 해고 노동자, 열정 페이의 미명에 혹사당하는 청년들,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이웃들, 어린이, 여성, 난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앓고 있는 이들....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이웃들이 고통으로 내몰려 있는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개인의 극기와 절제에만 집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하느님이 대견해 하실 거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대면해야 할 나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여전히 개인적으로 편태와 같은 고통의 도구가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도구는 세상의 비참을 외면하도록 만들지 모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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