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7월 10일(연중 제15주일) 루카 10,25-37

바리사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다. 영원한 생명이란 주제는 유대 사회의 갈등이자 갈망이었다. 이를테면, 바리사이는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었고, 사두가이는 그러지 않았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의 삶이 죽음 이후에도 가능하다는 바리사이의 믿음이었으나 사두가이에겐 그런 바리사이가 변절자이기만 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건, 유대 율법의 요약이고 핵심이다.(신명 6,4-5; 레위 19,18 참조) 예수를 찾아 온 율법교사는 전통적 유대 율법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유대 사회가 완전히 합의하지 못한 개념과 연결한다. 율법을 잘 지키면 죽음 이후를 보장받는다는 논리는 유대 사회 안에서 논쟁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여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영원한 생명이라든가, 부활이라든가 하는 주제는 유다이즘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전통을 기반으로 보수적 입장에 섰던 사두가이에겐 낯설고 불편했다. 그러나 대개의 바리사이는 제 민족의 전통과 이방 문화의 소통을 즐겨 했다. 시대의 흐름 안에서 율법과 전통을 새롭게 읽어낼 줄 알았다. 예수는 그런 바리사이를 인정한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어찌 보면 영원한 생명을 두고 예수와 바리사이는 뜻을 같이 한 셈이다.

▲ '착한 사마리아인', 렘브란트. (1638)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문제는 율법을 통한 생명이라는 논리의 적용 범위다. 율법은 철저히 유대 민족 안에서만 유효했다. 하느님은 유대 민족만의 하느님이었고, 이웃은 유대 민족 안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하느님 사랑이든 이웃사랑이든 바리사이에겐 그들만의 정당함이었고, 그들만의 계급에 최적화된 합리화였다.

예수는 달랐다. 이웃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웃의 범위나 규정을 아예 없애 버린다. 이를테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예수에게 이웃은 본디 이웃이 아니다. 이웃은 ‘되어 주면’ 된다. 지금 원수라도 이웃이 될 수 있고, 지금 하찮고 천박한 사람이라도 훌륭한 이웃이 될 수 있다. 이웃의 조건은 민족이나 신앙, 계급이나 사상의 차별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함께 하려는 ‘자비’다.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준 두 데나리온은 이틀치 노동자의 일당이었다. 당시 숙박비로는 2주간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상처를 싸매 주고 제 돈까지 써가며 강도 만난 이를 보살피는 건 대개의 사람이면 가능하다. 나는 오늘 복음에서 이런 사랑의 실천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실천의 문제보다 더 중한 것은 사고의 변화다. 흔히 예수를 찾은 율법교사에 대해 비판적 논조로 오늘 복음을 해석하곤 한다. 그래선 안된다. 율법교사는 예수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누가 이웃이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내 눈에 벗어난,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도 밉고 싫은 이를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문제는 사랑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제 스스로의 규정이 고약하거나 못돼 먹었기 때문이다. 이웃이 되어 주는 건, 실천만으로 부족하다. ‘포커페이스’로 이웃이 될 순 없다. 민중은 개, 돼지며, 신분제가 공고히 되어야 한다는 어느 교육부 고위직 인사의 말이 회자되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이웃은 계급 갈등을 뛰어넘고, 사상적 차별을 부술 수 있는 사고의 전복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제 사고의 탈출없는 적당한 사랑과 봉사는 제 삶의 정당함과 합리화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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