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7월 3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의회에 넘길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의회에 넘기는 이유를 우린 물어야 한다. 단순히 종교적 차원에서 말하자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라는 호칭은 종교적인 것만도, 정치적인 것만도, 사회적인 것만도 아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차원을 포함한 총체적 호칭이다. 의회, 곧 쉬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 역시 그러했다. 회당은 일종의 입법 기관이고 처벌 기관이며, 그리하여 종교와 정치가, 종교와 사회가 구분되지 않은 유대 사회의 모든 차원을 수렴하는 총체적 기구다. 이를테면, 예수의 제자들은 대대로 사회의 총체와 갈등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과의 불화와 사회적 갈등이 ‘사람들’과 ‘의회’로 대변되며, 예수를 따르는 십자가 길에서 이 갈등은 생략되어선 안된다.

'총독들'(ἡγεμών)과 '임금들'(βασιλεύς)의 등장은 세상과의 갈등을 더욱 확장시킨다. 유대 사회만이 아니라 이방 사회 안에서조차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로 인해 박해받으며 인내로 예수를 증거했다. 예수를 따른다는 종교적 현상은 세상의 ‘다스림’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현상과 맞물려 있음이 틀림없고 의도했든 안 했든 제자들의 필연적 운명이었다.

▲ '사도들의 순교', 스테판 록너. (1435)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오늘 복음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는 ‘견디어 내어라’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말 '휘포메노'(ὑπομένω)는 고통에 맞서 참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리가 어딘지 알고, 그 자리를 지켜 내어라'는 뜻을 품는다. 세상에 대적해서, 세상을 겨냥해서 하늘 나라의 논리를 제시하는 게 증언이 아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그것으로 박해를 받는 것은 제 할 도리를 하는 것일 뿐이다. 현실을 핑계 삼아 하늘 나라를 포기하지 말고, 현실이 어떻든 하늘 나라를 위해 현실의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 삶이라면, 우리는 제자들의 필연적 운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갈등과 대립은 혼자만의 몫이 아니다. '너희'라는 주체는 예수가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의 주체다. 특정한 시대와 시간 안에 머무는 '너희'가 아니라 지금껏 수많은 '너희'가 예수를 증언했고, 그 증언으로 세상의 권력과 박해를 견뎌 냈다. '너희'는 지금도 생생히 우리 곁에 있으며 우리가 '너희'고 '너희'는 우리로 살아 숨쉰다.

세상이 시끄럽고 정치가 피곤하다 해서 세상을 '초월'하고자 모이는 곳이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현실과 어떻게 부딪히고 살았는지 고민하는 데서 참된 가치를 발견한다. 부딪히고 다치고 멍드는 일이 종교가 걸어가야 할 길인데, 왜 우리는 늘 인자하고 웃어 주며 기뻐해야 하는지.... 늘 궁금하기만 하다.... 혹시 ‘성인병’(聖人病)에 걸린 건 아닐까....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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