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처럼 - 영화 '우리들']

어릴 적 가장 싫어하는 놀이는 ‘의자 놀이’와 ‘짝짓기 놀이’였다. 인원보다 적은 수의 의자를 두고 서로 먼저 앉기 위해 다투어야 하는 ‘의자 놀이’, 진행자가 부르는 숫자대로 짝을 맞추어야 하는 ‘짝짓기 놀이’는 놀이라기보다는 전쟁 같았다. 몸과 머리의 순발력이 떨어져 이리저리 친구들 사이를 뛰어다니다 혼자 남게 될 때의 소외감이란 참 잔인한 경험이었다.

'우리들'(윤가은 감독, 2016)의 첫 장면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어린 시절의 이러한 감정을 순식간에 불러일으킨다. 체육시간, 피구를 하기에 앞서 편을 가르는 아이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자기 편이 될 친구들을 호명한다. 때론 미소를 지으며, 때론 간절한 눈길로 ‘이번에는 내 이름을 불러 주겠지’하고 바라던 여자아이 선. 그러나 선의 이름은 가장 마지막에 불리고 피구가 시작하자마자 ‘금을 밟았다’는 친구들의 억지에 퇴장당한다.

선은 유별나게 나쁘거나 모자란 아이가 아니다. 부모님은 생계로 바쁘고, 빠듯한 가정 형편에 어린 동생을 돌보며 어리광을 부리지는 못하지만 따뜻한 사랑과 안정감이 흐르는 환경에서 살아간다. 선이 같은 반 친구들에게 잔인하게 따돌림을 당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선이 함께 놀고 싶어 하는 보라와 그 친구들은 생일파티 장소를 일부러 잘못 알려 주는 등 매우 악랄하게 선을 골탕 먹이기까지 한다.

▲ 선이 같은 반 친구들에게 잔인하게 따돌림을 당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이미지 출처 = 엣나인필름)

그런 선은 여름 방학을 앞두고, 따돌림을 피해 전학 온 지아를 만나게 되고 방학 동안 둘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우정을 쌓아 간다. 하지만 또다시 왕따가 되는 걸 두려워한 지아가 교실의 권력 그룹인 보라와 어울리고 선을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둘은 계속 서로를 할퀴고 상처 입히게 된다. 그들의 자의적 선택이었든, 교실 권력의 거부할 수 없는 작동이었든 간에 아이들의 행동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선의 엄마가 선의 아버지에게 선이 겪는 곤란함을 상의하자 아버지는 대답한다. “애들이 뭐 특별한 일이 있어.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랑 놀면 되지” 어른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아니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고 흔히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이들의 삶에 근접해 그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포착해냈듯 아이들의 세계 역시 어른들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교실 또한 사회와 똑같은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어른들이 날마다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듯 아이들 역시 자신들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눈물겹게 애쓴다.

▲ (이미지 출처 = 엣나인필름)

이 영화를 보고 그 사실을 발견했다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아이들이 ‘동화’의 세계에 사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잠시 미루어 두면 좋겠다. 대체 어른들이 생각하는 ‘동화’란 뭐란 말인가. 여전히 우리 ‘동화’들이 아이들에게 안온한 꿈과 공허한 사랑을 속삭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들을 천사 같은 존재로 바라보고, 아이들이 사회와는 떨어진 진공 속에서 사는 것마냥 그린다고 여기는 걸까.

이 영화가 눈여겨본 아이들의 세계는 이미 많은 ‘동화’가 수없이 이야기해 온 바다. 동화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세계를 가감 없이 바라보며, 나아가 이를 어린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를 줄곧 고민해 왔다. 생일파티 사건을 비롯한 이 영화의 다양한 에피소드는 많은 동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려는 시각 역시 동화가 계속 주의하는 지점이다. 요즘 ‘동화’는 더 이상 ‘동화’가 아니다. 그러니 무심하게 사용하는 관용어처럼 ‘동화’라 말하지 말았으면, 아이들이 정말 궁금하다면 어른들도 ‘동화’를 읽었으면.

영화 마지막 부분은 다시 피구 장면이다. 결국 보라 그룹에서 쫓겨나게 된 지아는 영화 첫 장면에서 선이 그러했던 것처럼 편을 가르는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마지막에 이름이 불린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금을 밟았다”며 나가라고 한다. 그 때 선은 말한다. “내가 봤는데, 안 밟았다”고.

▲ (이미지 출처 = 엣나인필름)
선과 지아는 다시 ‘우리들’이 될 수 있을까. 선과 지아가 ‘우리들’과 ‘너희들’을 가르는 보라 그룹에게 당당하게 자신들을 ‘우리들’이라 선언하면 좋겠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함께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물이 아직은 조금 남아 있으니 가능할지 모르겠다. 봉숭아꽃물 위에는 보라가 던지듯 건넨 하늘색 매니큐어가 덧칠됐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몸의 일부로 오래도록 남아 있는 건 매니큐어가 아닌 봉숭아물일 테니까.

영화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어른들과 똑같이 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상처받으며 매일을 살아내는 아이들의 이야기, 즉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어른 관객은 이 영화에서 ‘우리들’의 모습은 사실 이러하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본다. 그리고 아이들을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인 자신들과 똑같은 ‘우리들’로 불러야 함을 발견한다. 아이와 어른이 똑같은 ‘우리들’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아이와 어른은 서로 소중하고 당당한 존재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유진(가타리나)
동시인. 아동문학평론가. 아동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한다. 동시집 “뽀뽀의 힘”을 냈다. 그전에는 <가톨릭신문> 기자였고 서강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곳에서 아동문학과 신앙의 두 여정이 잘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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