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여성 헬기 조종사 1호 복직투쟁

“군대는 계급 안에서는 남녀가 평등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군은 거기에서도 제외됐습니다. 유방암 수술로 인한 장애 판정으로 강제 퇴역시킨 것은 부당하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지만 국방부의 항소로 복직의 길은 아직 요원합니다. 하지만 함께 해주는 많은 이들이 있어 지금은 외롭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여성 헬기 조종사 1호 피우진 중령(52세) . 그녀는 매주 목요일 ‘피우진 중령과 함께 하는 사람들’ 과 더불어 ‘ 피우진 중령 복직 촉구 캠페인 ’ 을 벌이기 위해 거리에 나선다. 매서운 한파가 거리를 얼어붙게 만든 지난 1월 24일 시위를 마치고 돌아서는 그녀의 발길을 붙들어 얘기를 나누었다.

인권 연대, 불사조 카페 회원들 주축으로 매주 목요일 명동 입구서 침묵 시위, 매월 첫 목요일엔 국방부 앞서 ..


▲ 오늘이 첫 시위라고 들었는데, 어찌 이리 날이 매섭습니까? 중령님께서 헤쳐나갈 길이 이처럼 매서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드는데 어떻습니까?

너무 추워서 함께 한 분들께 미안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따뜻합니다. 지금은 한결 마음도 편안하구요. 승소 판결이 났을 때 ‘아, 이제 복직되는 일만 남았구나’라고 생각했죠. 주변에서 국방부가 그냥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만 저는 그래도 희망을 걸었지요. 결국 국방부는 고등법원에 항소를 했고, 이제 또 싸움이 시작된 거죠. 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마음도 단단해졌고. 힘이 되어주는 많은 분들이 있어 외롭지 않습니다. 처음 강제 퇴역을 당한 후 상처도 많이 받았고 복직을 위해 싸우면서 고민도 참 많이 했습니다. 군대 안에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당함과 싸우기 위해서는 사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여군으로 군대 사회에 몸담고 있었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막막하기만 했어요. 그때 만난 곳이 ‘인권실천시민연대’입니다. 굉장히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편견 없이 얘기를 들어주었고, 사람을 중심으로 어떤 일이든 생각하게 해 주었어요. 결국 사회적으로 이슈화를 해냈어요. 맨 처음 <한겨레신문>에서 다뤄졌고, 각 언론 매체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 후 다음 카페 ‘불사조’에서 자발적으로 나서서 나를 도와주었고, 지금의 캠페인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 병마와 싸우는 것은 힘들지 않았습니까? 건강한 몸으로 군대 생활을 하다가 덜컥 유방암 판정을 받았을 때 충격이 컸을 것 같은데요?

생각만큼 그리 크게 충격을 받진 않았습니다. 내 몸에 생긴 병이라면 싸워서 이기면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가슴이 여성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군대에서 어떤 면에선 걸리적거리는 신체의 일부이기도 했으니까요. 실제로 군대 안에서 여성의 상징이라는 것이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체력 단련이나 훈련 때 불편한 것도 있지만 남들의 시선이 부담이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왼쪽 가슴에 유방암이 생겼는데, 양쪽 가슴 모두 절제를 했습니다. 군은 나의 전부였고, 군 생활 속에서 불편을 느꼈던 신체의 일부를 제거해 앞으로의 군 생활을 더 강한 군인으로, 더 열심히 임무 수행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선택한 일이지요. 그리고 수술 후에는 정말 체력 단련을 열심히 했어요. 물론 수술 후 4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 때는 좀 힘들기도 했지만 어떤 병도 나의 발목을 잡진 못했습니다. 항암 치료까지 마치고 무사히 군대로 돌아왔고, 그 후 3년 간 훌륭히 보직을 수행하며 군인의 임무를 다했습니다.

▲ 그런 결단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그런데 왜 3년 후에 퇴역을 하신 겁니까? 강제 퇴역 이유가 유방암으로 인한 신체장애 판정이라고 들었는데요,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 수술 후 3년 동안의 복무기간이 있었다면서요?

수술 했을 때 제 근무지가 논산 항공학교였어요. 그 옆에 야산이 있었는데 매일 저녁 한 시간 반 이상 산행을 했고, 달리기를 하면서 체력 단련을 했어요.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체력 검증에서도 1급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어요. 스스로 느끼기에 몸도 가벼워졌고, 체력도 병이 나기 이전만큼 회복되었다고 생각됐죠. 2002년 10월에 수술을 받았고, 2005년에 장애 2급 진단을 내려 퇴역 시켰어요. 말은 그리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지휘관과 빚어진 갈등이 강제 퇴역의 가장 큰 원인이었어요. 비행기도 타고, 보직도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건강 검진을 한다고 군 병원으로 발령을 내더라구요. 그냥 얼마 있지 않아 돌아올 줄 알았죠. 그래서 관사에 짐을 그대로 두고, 부하 장병들과 인사도 하지 않았죠. 그러나 관사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1년 간 병원에 있다가 퇴역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없어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대대장을 두고 병사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때가 제 생애 가장 힘들 때였습니다. 오죽했으면 탈영을 해서 나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일들을 알리고 싶은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 그렇게 힘든 시기에 버틸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 있었을 텐데요,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시기 뿐 아니라, 나의 군대 생활 내내 나를 버티게 했던 힘은 군대를 군대답게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군인으로 살면서 힘들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그 길이 좋았기에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군인은 계급 안에서는 평등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군은 거기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군대에서 여군에 대한 인식은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죽했으면 여군은 병과가 여군이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비행조종사의 병과는 항공입니다만, 조종사였던 저의 병과 역시 ‘여군과’였죠. 그런 것에 대해 온 몸으로 싸웠습니다. 온 군대 생활을 그것과 싸우면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군대는 나의 전부였고, 내 삶을 송두리째 바친 나의 일터의 부조리에 대해 그것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 와중에 아무 보직도 없이 군병원에서 1년을 보내야 했으니, 그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애써 다스리며 세상에 내놓은 책이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책이예요. 군대의 실상을, 그것도 여군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리 사회에 고착된 여군의 이미지는 결국 허상인 셈이죠. 여군들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사회의 여성들과 연대하기도 쉽지 않고 그래서 그 이미지가 고착될 수밖에 없기에 책을 통해 그런 것들을 밝혔다고나 할까요. 여군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은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입니다.

▲ 복직 촉구를 위한 서명운동도 전개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시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의외로 많은 분들이 저의 문제를 알고 계셨습니다. 언론의 덕이라고 봐야겠죠. 고등법원 항소심에 참고 자료로 제출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도심에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사실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등산을 하면서 산에서 만나는 분들과 대화도 하면서 서명을 받자는 것이었죠. 결과는 참 좋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따뜻하게 받아주셨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도봉산을 비롯해 인왕산 부산 금정산, 제주 한라산 등을 등반했고 더불어 서명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름 유출 사고로 고통 받고 있는 태안의 이웃들을 위해 불사조 카페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서명을 받기도 했구요. 지금까지 600명 가까이 서명을 통해 마음을 모아주셨습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 지난해 3월 군이 피우진 중령을 강제로 퇴역시킨 근거가 됐던 군인사법시행규칙이 개정됐고, 이어 10월에는 서울 행정법원이 “국방부의 퇴역 처분을 취소한다” 며 복직 판결을 내렸습니다만, 여전히 또 한 차례 법정 공방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내년이면 계급 정년에 해당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추진하시는 일이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말씀하신대로 어차피 승진하지 못하면 군대가 정한 계급 정년에 따라 내년에는 퇴임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되든지 다시 군에 복귀해서 명예롭게 퇴역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때는 계급 안에서 평등할 것이란 게 꿈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의무 기간만 복무하고 전역하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위로 임관되고, 검은 베레모를 쓴 특전사 중위를 거쳐, 1981년부터는 국내 최초 여성 헬기 조종사로 조종간을 잡는 그 매 순간을 군인으로 살았고, 대대장으로 부하 직원들을 통솔하면서 지휘관으로서의 소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군에 대한 애정 또한 크고요. 그러기에 군으로 꼭 다시 돌아가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미안한 것은 어쨌든 군대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사회에서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 그래서 많은 오해도 받았고, 본말이 전도되기도 한 것이 못내 마음 아프고 나와 관계를 맺었던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우선은 복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예가 있어요. 지난해 어떤 분이 수색 작전을 하시다가 양다리를 잃고 장애 등급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중령에서 승진을 한 후 육군 대학의 교수 요원으로 가셨습니다. 군대라는 조직은 참으로 방대합니다. 그 조직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찾아 보직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물론 남자였죠. 양다리가 없는 사람이 유방이 없는 사람보다 군대 생활하기가 더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국방부 장관에게도, 참모 총장에게도 이메일로 진정을 했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이 여기까지 흘러왔고,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지요. 하지만 사안의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든지, 앞으로 나는 여군의 실태를 알리고 여군의 지위 향상과 군대 안에서의 평등을 위해 죽는 날까지 힘써 노력할 것입니다. 군대는 나의 모태이며 내 생명력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군대를 사랑합니다.

피우진 중령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내 가슴은 따뜻하게 젖어왔다. 직업 안에서 당당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던 사람, 끝내 여자이기 보다 군인이기를 고집했던 사람, 조직에서 밀려났지만 여전히 그곳을 향해 사랑을 불태우는 사람, 그녀의 환한 웃음은 이 땅에서 힘없이 밀려나는 약자들의 앞길을 밝혀주는 빛이 되어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상인숙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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