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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설문대할망의 귀환 소식이 들린다[책장을 넘어 세상으로 12]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고혜경, 한겨레출판사, 2010
최우혁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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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21  13: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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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배경으로 전해지는 위대한 여신 설문대할망의 이야기가 신화학자 고혜경의 글을 통해서 그 속살을 드러내고 그 황당한 이야기에 넋이 나간 이들을 긴 성찰로 이끄는 매력적인 텍스트로 변신했다. 오래된 사찰이 희미해진 선을 따라서 새롭게 단청을 하고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혹은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이 몇 년간의 복원 작업을 통해 시간을 뛰어넘는 선명한 색감을 되살려 내어 오히려 그 낯설음을 마주한 이들이 당혹하는 것에 비교할 수도 있겠다.

   
▲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고혜경, 한겨레출판사, 2010. (표지 제공 = 한겨레출판사)
저자는 제주를 평화가 깊이 뿌리 내린 땅이며, 위계가 없는 평등한 땅이라고 소개한다. 1800가지 신이 살고 있으며 300여 신화와 500여 신당을 통해서 곳곳에 간직된 이야기를 전하는 땅이며, 그 이야기들은 신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제주를 우주적 차원에서 조명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 안에서 우주와 미세한 그물망으로 연결된 제주의 이야기들은 신화의 감성으로 창조를 기억하고 왕성한 우주의 기운을 불어 내어 만신창이가 된 질서를 새로이 회복하려는 새로운 꿈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제주의 산과 오름, 강과 바다를 만든 여신인 설문대할망은 제주의 기원과 그곳 사람들이 의식과 무의식 안에서 만나는 신의 모습을 알려 준다.

어떻게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옛 신화에 숨겨진 깨알같은 이야기들이 21세기의 분석과 재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미래의 지평과 맞닿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과거를 새롭게 읽는 역사학의 방법, 혹은 인류학적 방법에서 이야기를 관통하는 “관점”에 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라산이 무릎에 걸쳐진다는 설문대할망은 그 한라산을 베고 누워서 제주 앞바다의 섶섬에 발을 걸치는 거인이며, 길쌈을 하기 위해 성산의 분화구에 솔불을 밝혔다고 전한다. 해가 뜨는 제주 동쪽 섬의 일출은 할망이 걸어 놓는 등경의 불이 되고 제주민들의 의식을 밝히는 불이 되었을 것이다. 할망은 세 발 달린 솥 덕을 만들고 그 위에 둥그런 솥을 얹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삼발의 솥 덕 위에 솥을 걸어 놓고 음식을 만든다. 또한 할망의 길쌈은 문명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상징한다. 씨실과 날실, 수평과 수직, 팽행함과 유연함, 강함과 부드러움, 긴 것과 짧은 것, 밤과 낮 등의 긴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길쌈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류의 모든 초기 문화의 첫 단계가 시작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27-28쪽) 저자는 베를 짜는 여성들이 시원의 기억을 길어 올려서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라고 해석한다.(40쪽) 여신들의 지혜와 힘은 물레질을 통해서 의식의 표면으로 길어 올려지고 오랜 어둠은 의식의 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 설문대할망 공원의 어머니의 방. ⓒ최우혁

할망의 창조는 배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제주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작은 분화구들인 360개 오름들이 신화에서는 할망의 급작스러운 배설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진 황금색 보물로 소개된다. 할망은 배설을 통해서 제주의 아름다운 오름들을 만들고 그 요란한 창조는 생명 에너지가 터져 나오는 축제의 모습이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75-83쪽 참조) 제주에서 전통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소와 말의 배설물은 주요한 비료가 되었고, 뒷간 아래 설치한 돼지우리는 인간의 배설물을 먹고 사는 흑돼지의 배설물이 자연비료로 순환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상생과 에너지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화로운 생태계의 원형을 보여 준다. 신화에서 똥과 오줌, 자궁과 출산은 죽음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생명의 순환을 드러낸다. 따라서 신화의 영웅들은 죽음에 비유되는 고통을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 설문대할망 공원. ⓒ최우혁

설문대할망이 바다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은 뻔뻔하고도 재미있다. 할망의 오줌홍수로 만들어진 제주 바다 남쪽의 해류가 북쪽으로 흐르는 섭지코지 앞에서 설문대할아방이 그 바다를 휘휘 저어서 물고기들을 몰고 할망은 아랫도리를 벌려 물고기들을 빨아 올렸다는 이야기다. 여신과 남신의 성적 유희를 통해서 생명활동을 표현하는 이야기는 할망이 혼자서 땅과 바다를 만든 이야기에 덧붙여진 것처럼 보인다.(161-164쪽 참조) 나아가 물고기가 새로운 만남이나 새로운 여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미루어서 수많은 물고기를 수용할 수 있는 여신의 너른 품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하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는 행위는 성적인 역할과 이미지가 분화되는 것을 보여 준다. 미분화된 형체들이 할망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와 새로운 의식을 형성하는 수면 위로 떠오른 것으로 그 흐름을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라산과 그 앞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거대한 할망은 어이없게도 한라산 중턱의 작은 호수인 물장오리에 빠져서 사라져버렸다. 거대한 키를 자랑하던 할망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상상은 신화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저자는 할망의 몸이 무의식의 물에 산산이 분해되어 사라진 것이며, 고대 여신 전통의 유적들은 이렇게 죽음이 생명주기의 한 부분인 것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죽음을 통해서 탄생과 균형을 이루며 새로운 생명의 질서가 확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할망이 제주의 작은 밑 빠진 호수를 통해서 바다로 녹아 들어간 것을 할망이 역사의 무대 뒤로 잠시 몸을 감춘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그래서 저자는 할망의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며, 할망의 부활로 우리의 정신에 태어날 새로운 가치에 관해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 온다.(194-195쪽) 잠자는 여신은 언제 어떻게 잠에서 깨어날까? 저자는 제주를 잠을 자는 할망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200쪽) 깊은 바다에 누워서 잠이 든 여신, 혹은 제주의 섬 전체가 여신의 몸이라는 발상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그 시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 제주 성산. ⓒ최우혁

그런데 나는 잠든 여신이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보고 싶다. 숲 속에서 잠자는 백설공주가 왕자님의 키스로 잠에서 깨어나는 이야기는 애니메이션 영화 '슈렉'에 등장하는 휘오나 공주가 그 이미지의 베일을 벗겼다. 여전히 두 팔을 번쩍 들어 기지개를 켜고 잠옷 바람으로 춤추는 상큼 발랄한 여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영국의 소설가 사라 워터스가 2002년에 발표한 소설, "핑거스미스(사기꾼)"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 '아가씨'를 오랜 잠에서 깨어난 여신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억측일까? 영화의 배경은 1800년대 영국에서 1930년대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으로 옮겨졌다.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 배경과 소품들은 모두 이야기를 위한 도구들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박찬욱 감독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가 만들어 낸 상업영화 안에서 찬란하고 발칙하게 부활한 설문대할망을 만날 수 있다. 그 할망은 탈출을 위한 반전을 계획하는 귀족 아가씨이거나, 그 아가씨를 이용해서 부자가 되려는 하녀로 등장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폭발하는 생명력을 발산하기에 아름답고 원초적이다.

   
▲ 부활한 예수를 첫 번째로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 '나를 만지지 마라', 프라 안젤리코.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아가씨'와 함께 말해야 하는 또 다른 영화는 1991년 니들리 스콧이 감독한 미국영화 '델마와 루이스'다. 여행을 떠난 두 여성이 성추행범을 죽이는 것에서 시작하여 경찰에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마침내 그랜드캐니언의 골짜기를 향해 빨간 오픈카로 돌진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끝난다. 그 영화에서는 여전히 여신이 깨어날 때가 아닌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2016년 봄, 노인들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노희경 각본의 연속극 '디어 마이 프렌드'에서는 세계일주를 약속한 남편의 구박을 평생 받아낸 정아 여사가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또 보면서 친구들과 함께 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다섯 할망이 모여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아직 남은 인생을 따스한 온기로 지펴 내는 노년을 만들어 가는 드라마에서 실제로 노년의 여배우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할망이 잠에서 깰 때가 되었다는 암시와 기원을 느낄 수 있다.

잠자는 할망을 깨우는 멋진 일은 바티칸에서도 벌어졌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6년 6월 3일에 발표한 교령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기념일을 축일로 승격시켰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불안에 떨던 제자들에게 그 기쁜소식을 전한 마리아 막달레나(요한 20,11-19)를 사도 중의 사도로 부른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는 이 사건은 하느님의 큰 자비와 여성의 존엄을 성찰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교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신앙이 그 본래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비로소 온 것이다. 마침내 여성들을 사도에서 제외했던 가톨릭교회가 전통이라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아~ 할망이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곳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최우혁(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립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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