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6월 19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ㄴ-22

예수가 바라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선, 악이라는 게 구별된다지만 예수에게 악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자신을 죽이려 덤벼든, 아니 진짜 죽여 버린 이들도 용서한 예수에게 악함은 도대체가 존재하기는 할까?

마태 18장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다. 예전 어떤 이가 동영상 하나를 보내 줬는데, 모 공영 방송의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분이 나와서 마태 18장의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마음이 적이 불편했다. 예수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은 형제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을 했다(마태 18,17 참조), 그러므로 모두를 사랑할 순 없다, 옆에 마음이 맞는 이들 사랑하기도 짧은 인생이다, 봐라, 예수 역시 싫은 사람은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겼다 등등의 말들을 그 ‘어떤 분’은 쏟아 내었다. 꺼려지는 이웃이나 친지가 있었던지 ‘끼리끼리’ 사랑하고 살면 된다는 그분의 말에 동영상 속의 청중들은 격한 공감을 보였고 그것으로 속이 편한 듯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혹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듯해서 동영상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예수는 마태 18장에서 편 가르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이 말하는 교회(ἐκκλησία)는 예수 당시 인간 대접 못 받던 어린이들도(마태 18,1-5 참조), 사람 취급 못 받던 비천한 이들도 함께하는 공동체였다(마태 18,10-11 참조). 물론 이방인과 세리들 역시 이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았다(마태 21,28-32 참조). 더우기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했다(마태 5,43-48 참조).

▲ '마태오를 부르시다', 헨드릭 테르 브루크헨.(1621)

‘유유상종’의 계급 간 편 가름은 교회 공동체 안에 엄연히 존재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외제 차’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레지오’, 천연 모피를 입고 ‘2차 주회’를 가 줘야만 폼이 사는 ‘레지오’가 있다는 말이 회자되곤 한다. 대개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은 ‘돈의 많고 적음’에 따른 갈등이고 ‘분배 정의’가 훼손된 사회 구조적 문제라서 이런 말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떠도는 것 자체가 ‘바알(돈)’과 ‘바벨탑(획일화, 줄세우기)’이 활개를 치는 공동체가 아닌지 되묻게 한다.

예수는 제 삶의 자리를 민중의 일상에 고정시켰다. 민중의 존경을 즐기며 책 속의 관념과 율법의 철저한 준수에 사활을 걸었던 바리사이들을 줄곧 비판하면서 거룩하지도 선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던 민중의 일상 속을 예수는 파고들었다. 예수가 추구한 거룩함의 자리는 민중의 삶이었고, 거룩함과 더러움, 선함과 악함으로 갈라 세우는 계급 질서는 예수에겐 오히려 악이었다. 예수의 지상과제는 민중을 갈라 놓는 계급 간 갈등을 없애는 것이었고, 예수에게 있어 선함은 더불어 살지 못하는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이 함께 뒤섞여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 제 몸으로 증거하는 것이었다.

신앙한다는 것은 세속의 더러움을 피해 영적인 순결을 찾는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신앙은 너덜너덜한 죄인이라도 할 수 있는 매우 불결한 것이다. 예수를 통해 순결한 것은 불결한 것의 외면이 아니라 오히려 불결한 것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묵시 2,5참조). ‘순결한 창녀’, ‘회개한 창녀’를 찾을 게 아니라 불결하고 죄에 허덕이는 창녀를 먼저 만날 수 있어야 예수가 목숨 바쳐 원했던 바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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