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6월 12일(연중 제11주일) 루카 7,36-8,3
서울에서 퀴어 축제가 열렸고, 행진이 뒤를 이었다. 동성애자의 축제는 우리 사회 현상 중 하나고, 제3의 성을 인정하든 안 하든 이미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목소리다. 현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현상 자체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행동은 분명 다르다. 몇몇 보수 개신교 단체는 퀴어 축제를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무엇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들에게 동성애자는 함께 있으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동성애자의 세상과 그들의 세상은 같은 세상이 아니다. 누가 이 하나의 세상을 둘로 갈라놓고 있는가. 분명 하나는 실재이나 다른 하나는 없는 것임에도....
죄 많은 여인이 예수에게 다가온다.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발을 닦는 모습을 두고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여인의 이미지에 몰두한다. 죄를 지었기에 어여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라’는 논리다. 그런데, 이런 해석엔 이분법적 현실 인식이 강하게 작동한다. 말하자면, 죄 많은 여인이 머무는 세상은 눈물로 대변되는 회개의 세상으로, 그 이야기를 접하는 우리의 세상은 죄와 상관없는, 그래서 죄인이 회개해서 돌아와야 할 ‘정상적’ 세상으로 인식한다.
'다행히도' 오늘 복음 이야기는 죄에서 용서라는 흐름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예수는 여인의 회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여인의 행동에 대해 ‘평가’했을 뿐이다. 여인이 보여 준 행동은 회개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빚을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큰 사랑을 보여 준다는 예수의 비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야기 처음부터 여인은 용서받은 사람으로 행동했다. 떳떳이 바리사이 집에 나타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을 식사 자리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보일만큼 온전히 예수를 사랑했다. 예수 시대 여성이 머리카락을 공개적으로 내보이는 것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일이었다. 여인은 지금 온 존재로 예수만을 바라보고 있다. 여인에겐 예수를 통해 하나인 세상만 존재한다. 예수를 사랑함으로 바리사이들이 만들어 놓은 죄인과 의인의 갈라진 세상을 이어 붙인다. 용서받은 자의 수동적 고마움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자의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세상을 여인은 예수를 통해 바라보고 있다. 이런 여인을 우리는 어떤 근거도 없이 ‘창녀’로 이해하곤 한다. 우리와 다른 죄 많은 ‘창녀’, 예수는 그 큰 죄인을 용서했다는 식의 해석은, 우리 교회 안에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 신앙인의 의식 안에서 세상은 늘 둘로 갈라져 있다. 죄인과 의인의 세상....
세상은 여러 관점을 가진 이들이 뒤엉켜 살아간다. 죄 많은 여인을 두고 여전히 죄와 용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있고, 죄 많은 여인에게서 ‘죄’를 제거한 있는 그대로의 여인,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여인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이 관점의 차이에서 우리는 갈등과 그로 인한 고민을 껴안고 살아간다. 퀴어 축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여러 관점과 같이 말이다.
예레미야 31장은 새 계약을 말한다. 새 계약은 모든 이의 허물을 용서하는 하느님을 통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모두가 하느님을 얻어 만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가능하다. 행실이 좋은 ‘정상적’ 사람과 행실이 나쁜 ‘비정상적’ 사람으로 살아가는 세상엔 새 계약도, 그 계약을 주시는 하느님도 없다. 믿는 이는 좋은 행실로 나아가도록 구원받은 것이지 좋은 행실에 의해 구원받은 게 아니다.(에페 2,10; 로마 3,21-30 참조)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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