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15]

요즘 우리 집엔 호롱게(탈곡용 발타작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바야흐로 밀, 보리 수확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옛날부터 이 시기를 가리켜 발등에 오줌 싼다고 표현했듯이 바빠도 이렇게 바쁠 수가 없다. 우리 신랑은 600평 손모내기를 마치자마자 밀과 보리를 베고 털고 하느라 이른 새벽부터 해질 녘까지 눈코 뜰 새가 없다.

농사일을 거들어 줄 여력은커녕 살림살이와 아이들 돌보는 일마저 신랑에게 의지해 왔던 나도 덩달아 바빠졌다. 다나 젖 먹이는 일이 아직까지도 수월치 않아 온종일 젖 물리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와중에 다울이 다랑이 챙겨야지, 빨래하고 청소해야지, 밥 차려야지.... 그렇게 아등바등 닥친 일들을 해치우다 보면 하루가 얼마나 짧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이건 뭐 3종 장애물 경기나 고3 수험 생활을 방불케 하는 체력전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밥상은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차려 낸다고 하지만 사실 간식거리까지 챙기기란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냉동실에 쟁여 둔 쑥떡도 동이 나고, 한 보따리 튀겨 온 옥수수 뻥튀기도 며칠 만에 사라지고, 딸기도 끝나고....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등골 빠지는 신랑과 밥그릇까지 씹어 삼킬 것 같은 아이들을 무엇으로 위로하나. 가뜩이나 장을 보러 나가지 않은 지 한 달 가까이 되면서 내 고민은 깊어졌다.

바로 그때! 완두콩이 통통하게 알이 차고 있었다. 점심 먹고 나서 잠깐 밭에 나가 그날 먹을 만큼의 풋완두콩을 따서 쪄 놓았더니 재미난 간식 놀이 시간이 펼쳐졌다. 그것으로 간식 걱정 끝! 아이들은 깍지째 쭈욱 훑어 먹으며 재미있어 했다. 어쩜 이렇게 다디단지 신기해 했고, 서로 달라붙어 있는 완두콩으로 애벌레 놀이도 하고, 완두콩알로는 그림까지 그리며 놀았다. 그야말로 콩 먹고 콩으로 놀고!(다랑이는 완두콩알을 콧구멍에 넣는 장난까지 했는데 콧구멍 속으로 들어간 콩알이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처음엔 걱정했는데 아프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 완두콩을 까먹는 시간! 언제 다 먹을까 싶어도 금세 콩깍지만 수북해진다. ⓒ정청라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완두콩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는 거다. 과자와 같은 간식을 먹으면 밥맛이 확 달아나는데 이건 전혀 그렇지가 않으니 참 착하다 싶지만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또 무엇으로 달래나.

바로 두유다. 우리 집에서 농사지은 각종 콩들(푸른콩, 메주콩, 쥐눈이콩, 선비잽이콩, 밤콩)을 물에 불렸다가 삶아서 곱게 갈아두면 출출할 때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 주는 훌륭한 간식이 된다. 두유 제조 담당은 우리 신랑인데 그 바쁜 와중에도 아주 까다롭게 두유를 만든다. 콩을 얼마나 삶아야 두유 맛이 좋은지, 된장으로 간을 할 때와 소금으로 간을 할 때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런 것까지 죄다 실험해 가며 명품 두유 레시피를 완성했다. 예전에 내가 만든 거칠거칠한 두유를 거부했던 다울이까지도 아빠표 두유는 엄청 좋아라할 정도로 부드럽고 고소한 맛! 이런 두유를 대체 어디서 맛볼 수 있겠는가.

두유는 때로 밥이 모자랄 때 구원투수로 등장하기도 한다. 서둘러 국수를 삶아 두유에 말아 먹으면 손쉽게 콩국수가 되기에 말이다. 아니, 꼭 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맛있어서 후식으로 콩국수를 먹기도 한다.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밥 한 그릇 다 먹고도 콩국수를 두 그릇 세 그릇 더 먹을 때가 있으니 밥 배와 콩국수 배는 따로 있는 것일까? 아무튼 꿀 한 되 분량 병에 두유가 한가득 채워져 있어도 하루면 뚝딱 먹어 치우니 우리 집 식구들 먹성을 누가 말리랴.(농사짓고 살기에 망정이지 돈으로 뭘 사다 먹는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감당이 안 될 것이다.)

▲ 밥 먹고 먹는 콩국수 한 그릇. 아, 든든하다! ⓒ정청라

거기에다 서리태는 밥할 때 듬뿍 넣어 먹어, 봄철 내내 볶은 콩 간식으로 요기해, 반찬거리 없으면 콩나물콩을 길러 콩나물 해 먹어, 겨우내 청국장 띄워 먹어.... 이처럼 삶 속에서 온갖 콩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러하기에 마당 한 켠에 신랑이 콩 모종을 해 놓은 것을 보며 잘 자라라며 간절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콩싹은 또 얼마나 예쁜지!

문득 "콩쥐 팥쥐" 옛날 이야기에서 왜 콩쥐가 착한 아이였나 그 까닭까지도 추리해 보게 되었다. 먹을 것이 귀했던 그 시절에는 먹으면 쉽게 배가 꺼지는 팥보다 포만감이 오래 가는 콩이 훨씬 더 착하다 여겨진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적당한 허기를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 식구들에게도 콩은 착한 이웃집 누나와 같은 고마운 존재다. 그리고 더 고마운 건 배가 고파서 무엇이든 맛있게 먹을 줄 알고 고맙게 여길 수 있는 빈 배가 아닐는지....

나는 요즘 사람들이 배가 고픈 줄 몰라 음식의 제맛을 느낄 줄도 모르고 음식의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무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넘치다 못해 버리고 썩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가. 진짜 맛도 모르면서 '미식'을 논하고 음식을 가지고 장난까지 치는 것은 죄악 중에 죄악이 아닐까? 언젠가 중국 소수민족 설화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엔 하늘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단다. 떡이고 밥이고 과일이고 날마다 와장창 쏟아져 내리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싶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음식을 하찮게 여기게 되었더란다. 먹다 배가 부르면 토하고 또 먹기도 하고, 심지어 아이 똥 닦을 때 쓰기도 하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화가 나셔서 날마다 내려 주시던 음식을 뚝 끊어버렸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먹을거리를 마련하게 되고부터야 사람들이 먹을거리의 소중함을 알고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우리 시대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이자 진실의 소리로 느껴졌다. 아,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로구나는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콩국수를 먹으며 콩을 기르느라 애쓴 우리 신랑의 땀방울과 여러 모로 도와주신 햇빛, 바람, 비를 느낀다. 그래서 더욱 뱃속이 든든하다. 지난해부터 유두(음력 6월 15일)에 친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콩국수로 유두 잔치를 열었는데, 올해도 꼭 그래야지.

친구들아, 한층 깊어진 2016 콩국수 맛을 기대해 줘!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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