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6월 5일(연중 제10주일) 루카 7,11-17

오늘 복음 이야기는 구약에 나타나는 사렙타 과부 이야기와 많이 닮았다. 예언자의 원조 격인 엘리야가 사렙타에 사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는 열왕기 상권 17장에 나타난다. 다만, 엘리야는 주님을 부르며 아들을 살렸지만 오늘 복음의 예수는 그의 말 하나로 과부의 아들을 살렸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 말하자면,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것이고,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다는 말이다.(루카 1,16 참조)

예수가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 하나가 루카에겐 중요했다. 루카에게 예수 탄생은 수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공생활의 절정보다 중요했다. 예언자들이 외쳤던 구원의 완성이 예수의 탄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게 루카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루카 2,10-11 참조) 구원의 완성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로 선포된다.(루카 4,16-22 참조)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었다. 민족, 나라 혹은 국가의 개념으로 루카는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난하느냐, 감옥에 갇혔느냐, 울고 있느냐, 다리를 저느냐가 중요했다. 요컨대, 루카는 계급의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가난한 이들의 계급에 집중한 루카의 입장은 오늘 복음 안에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는 살길이 막막해져 버렸다. 예수 당시 과부는 경제적 활동에 제약을 받은 계급이고 남자이자 젊은 외아들에게 생계를 의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외아들의 죽음은 과부의 경제적 죽음과 직결된 문제였다.

▲ '예수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다' 몬레알레 대성당 모자이크.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예수는 이런 상황에 ‘가엾은 마음(σπλαγχνίζομαι)’으로 다가선다.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내장이 끊기는 아픔을 가리킨다. 예수는 과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내고 있다. 주검에 손이 닿는 것은 부정한 일이었음에도(민수 19,11.16 참조) 예수는 관에 손을 댔고, 외아들을 살려내어 어머니께 돌려주었다. 이 모든 일은 예수가 저승과 죽음의 열쇠를 가진 하느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묵시 1,18 참조) 죽음조차 꺾어 버리는 예수-하느님의 전지전능함은 가난한 이, 배고픈 이에 대한 배려와 맞닿아 있다.

하느님이 백성을 찾는 일은 단순하다. 가난한 이의 아픔을 들어 주고 챙겨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찬양하는 하느님은(16절) 가난한 이의 하느님이고, 루카는 이런 하느님이 온 유대 땅에 선포되었음을 상기시킨다.(17절)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친하고 그들의 삶에 우리 삶이 만날 수 있도록 사는 건 쉽다. 어려운 건, 가난한 이들과 하나가 되는 ‘가엾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되는 건, 우리가 가난해져야 하는 일과도 같다. 내가 가진 것을 팔아 내어놓는 것,(루카 19,1-10 참조)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루카 9,23 참조) 그리하여 제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다.(루카 9,24 참조)

긴 말 말자. 오늘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 그중 하나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눠 주는 것, 그게 외아들을 살린 예수를 오늘 내 삶에 다시 살려내는 일이다. 무엇을 팔아야 할까....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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