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보도하는 용어에 대한 안내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 드림

한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교우의 죽음에 대해 “선종”이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그런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얼마 전부터 기사문에서 이 용어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까닭은 “선종”이라는 단어가 그 뜻 자체는 좋지만 실제에서는 대상에 따라 선택적으로 쓰이는, 차별적 용어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영어권 교회언론 대부분에서는 이미 예전에 쓰던 pass away를 쓰지 않고 die라고 씁니다.)

“(모든) 가톨릭 신자에 대해서는 선종이라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만히 현실을 반추해 봅니다. 교회 안에서 “선종”이라는 단어는 교회 안에서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지닌 이들에 대해 쓰이고 있으며, 특히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은 층에 대해서는 쓰이지 않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 새벽에 성당 들머리에서 미혼모인 박 아녜스 씨(16)가 (       ) 상태로 발견됐다.” 이 괄호와 기사 제목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선종”을 넣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전의 교회 언론은 이런 이들을 주된 보도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러한 은폐된 차별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상의 비천한 이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주요 기사로 다루고, 세상은 온갖 차별에 민감해졌습니다. 또한 이전의 교회 언론은 거의 대부분 교회 내부의 일만을 다뤘지만 지금은 교회의 벽을 넘어 사회 문제 거의 전체를 다룹니다.

신자의 죽음과 비신자의 죽음, 신자 가운데서도 주교의 죽음과 열아홉 비정규직 노동자 평신도의 죽음이 한 지면에 동시에 실립니다. 한 기사 안에, 심지어는 한 문장 안에 같이 실립니다. 이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가톨릭 신자(특히 일정한 연배 이상의 분)에 대해서는 “선종했다”고 쓰고 다른 이에 대해서는 다르게 표현하기가 기술적으로나 원칙적으로나 어렵습니다.

이전에 없던, 더 정확히는 보이지 않던 이러한 문제점이 생기는 것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그리고 독자분들이 세상에 열린 교회를 지향하며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끼는 이, 존경하는 이의 죽음을 소중히 대하고 싶은 심정은 모두가 가진 정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선종”이라는 단어가 차별적이기에 쓰기 어렵다고 보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에 안긴 모든 이들에 대해 “선종” 대신에 죽음에 대한 존중을 담아 쓸 보도 용어를 고민한 결과 “숨지다”라는 용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희는 대통령이 죽어도 “서거”와 같은 차별적 용어를 따로 쓰지 않고 세월호에서 숨진 한 학생과 마찬가지로 보도할 것입니다. 아울러 소천(개신교), 열반(불교)과 같은 용어를 죽은 이의 종교에 따라 일일이 따져 쓰지 않으며, 별세, 서세, 작고와 같은 한자어를 쓰지 않습니다. 다만 “숨지다”와 “죽다”가 기사 안에서 너무 자주 반복되는 경우에 이를 피하기 위해 “사망”으로도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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