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5월 29일(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루카 9,11ㄴ-17

첫번째 예.
강남역 사건을 두고 여혐 사건이라 사람들은 말한다. 여자에 대한 혐오는 남자 계급이 불러온 차별의 범죄다. 그럼에도 여혐에 대한 사건이 아니라며 강변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며 그 목소리는 남자 계급의 오래된 개소리다. 여자든 남자든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인간답지 못한 목소리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는 그럴듯하게 발전한 듯하나, 예수 시대의 인권 수준을 여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여자는 억압받고 있고, 죽는 일이 생겨나는데도 ‘여자는 억압받지 않는다’, ‘그저 정신병자의 소동일 뿐이다’ 일축하는 남자들은 인간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예.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간이 대학 축제 기간과 맞물렸다. 대학에서 소임을 하는 관계로 대학의 크고 작은 축제나 모임들이 약간의 소음으로 내 방에까지 전해진다. 예전 대동제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내 눈과 귀에 들어온 대학 축제는 주점의 화려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하다. 고리타분한 구세대의 핀잔일진 모르지만, 지금 대학 축제는 적어도 내겐 그러하다. 거기에 가수들의 돈벌이 무대로서 대학 축제는 대학 서열을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되기까지 했다. 싸이가 오면 일류 대학, 무명 가수가 오면 ‘따라지’ 대학.... 대학 저편에서 들리는 홍진영(트로트 가수란다)의 노랫소리에 학생들의 열광소리가 무거운 베이스음으로 내 방 창을 때린다. 홍진영을 부른 우리 대학 수준은 어떠할까?

세번째 예.

▲ 빵과 물고기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예수는 배고픈 이를 배 불렸다. 빵의 기적은 신기한 이적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이야기다.(루카 9,9 참조) 제자들은 황량한 곳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었고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야 한다 했다. 예수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였다. 여자는 없었는가, 아이들은 없었겠는가?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는 표현은 남녀 차별 아닌가? 열두 광주리에 조각만으로 가득 찼다는 이야기의 끝은 예수라는 존재가 모든 차별을 뛰어넘어 풍성한 나눔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충분하다. 장정만 기억하는 사회 안에 장정만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줬고, 주변 마을과 촌락에서만 먹고 쉴 수 있다는 현실 논리 안에 황량한 곳에서도 나눌 수 있음을 보여준 게 예수다. 진짜 배고픈 건,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궁핍할 때가 아닐까. 남자가 대접받으며 여자를 억압해도 남녀 평등의 세상이라 외치는 정신적 궁핍, 제 삶의 축제를 남의 인기로 갈무리하려는 게으른 정신의 궁핍, 이런 궁핍이 우리를 점점 더 배고프게 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을 보고 들으며 산다. 제 삶에서 유익이 되거나 교훈이 되는 예시들을 찾는 건 순전히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가에 달려 있다. 성체 성혈을 영하면서 나는 빵과 포도주를 영하는가, 아니면 예수의 살과 피를 영하는가. 예수가 실제 살덩이로 다가와도 그런 예수를 박제된 제 삶의 틀 안에서 기억만 하되 그런 예수는 먹지 않았다 여기지 않는가. 그러면서 나는 여전히 예수를 배고파하고 있지는 않는가.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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