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나들이]

▲ Edith Stein in Auschwitz

1998년10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의 베드로 광장에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순교한 유다계 독일인 에디트 슈타인을 시성하였다.

유다인, 철학자, 봉쇄 가르멜의 수도자, 순교자로 불리는 그의 삶과 학문의 깊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풍부하고 깊은 인간적 감동과 모범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를 가톨릭 교회의 성녀로 받드는 것은 그의 가족을 포함한 유다교인들에게 적지않은 반향을 일으켰고,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지난 세기의 인류 대학살을 해석하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두 입장에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앙금이 침전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러나 번복되는 역사 앞에서 에디트 슈타인, 또다시 그를 기억하고 변명하는 것은 역사의 진리가 그에게서 깊은 밤을 깨우는 샛별처럼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며, 날선 검의 빛으로 밤의 침묵을 살해하는 또 다른 그의 아침이 우리에게서 부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Edith Stein 1931A
에디트 슈타인은 현상학자로서 집필한 <국가론>(1925) 에서 하느님의 모양으로 지어진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그 정의를 실현하는 정도에 따라 그 국가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직 틀을 갖추지도 않은 독일 국가사회주의 (나치즘)의 성격과 그 미래를 우려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제 3제국을 세우자 곧 그 파시즘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독일의 미래와 유다인들의 운명에 관하여 깊이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말뜻 그대로 히브리어 쇼아(Shoah)란 유다인 전체를 말살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위기를 인식한 에디트는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0세를 알현하고 상황의 긴박함을 알리려 시도했지만, 그의 지성과 관계없이 한 이름없는 평신도로서는 이루기 어려운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도신부였던 보에른의 수도원장 발쩌 신부가 알현을 위해 로마에 가는 길에 밀봉한 편지를 로마에 전달했고 편지가 접수되었다는 확인서를 받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70년이 지난 2003년 2월 15일, 바티칸의 문서국에서 공개한 그의 편지 (Arch. AA. EE. SS, Germania 643, 1092/33) 는 히틀러의 제 3 제국에서 유다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과 가톨릭의 교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유다인들을 구원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몇 주 전부터 이곳 독일은 이웃사랑으로는 이해 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를 총체적으로 말살하는 일련의 사건에 직면했습니다 ... 유다들인 뿐만 아니라, 독일 안의 또 전세계의 지각 있는 가톨릭 신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이름을 악용하는 이 상황에 반대하는 교회의 목소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일 라디오를 통해서 대중을 포격하는 인종차별주의와 국가권력이란 이 우상은 과연 새로운 이단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또한 유다 종족을 고발하고 수용소로 끌어가는 이 전쟁은 우리 주님과 성모님, 또 사도들의 그 거룩한 인성을 더럽히는 것이 아닙니까? ...

이 상황은 십자가에서 그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우리 구원자의 모습에 전적으로 반대되지 않습니까? 또한 평화와 화해를 이루어야 할 이 기쁨의 해를 더럽히는 얼룩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자녀로서 작금의 독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는 만약 이 상황에 대한 교회의 침묵이 더 지속될 경우 교회의 이미지 자체가 실추 될 것에 대해 깊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는 유다교에 대한 것 보다는 은밀하고 덜 잔인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덜 조직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오래지 않아 어떤 가톨릭 신자도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상관없이 지낼 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 Via Crucis-Koder Siger
우리는 나찌즘의 비인간적, 반유대적, 반그리스도적 성격을 지적하고, 그 잔인한 전쟁에 말려들고 있음을 경고하는 그의 예언과 마주한다. 그는 비오 11세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는 것의 의미를 되묻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1900년째인 그 희년에 유다교와 화해할 것을 요청한다.

에다트 슈타인은 반인륜적인 나찌즘을 전체주의의 악마로 규정하고 결코 그리스도의 왕국과 공존할 수 없음을 밝히고, 그럼에도 전쟁과 학살의 총체적인 파괴를 넘어서는 섭리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독려한다. 그리고 그 희망 안에서 유다인들의 운명에 함께 하기 위해서 그가 택한 길은 구약성서의 에스더 왕비가 택했듯이 죽음과 맞닥뜨리는 길이었다 (에스더 4,16-17).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라는 이름으로 가르멜의 수도자가 된 에디트 슈타인은 1939년 성 토요일에 자신의 동족인 유다인과 또 지상의 평화를 위하여 속죄물로 자신을 봉헌할 허락을 청했다. 우리는 그의 유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그의 영적 성숙을 볼 수 있다. 또한 1942년 맨발 가르멜회의 사부인 십자가의 요한 탄생 사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집필한 십자가의 신학에서는 그 시대의 밤과 죽음을 지탱한 십자가에 대해 신비신학의 입장에서 해석을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인 에디트, 그에게 십자가는 부활을 향한 길일 뿐만 아니라 그 깊은 밤에 십자가 위의 신랑과 더불어 사랑을 나무는 아가서의 생명의 나무를 의미했다.

그의 봉헌은 그를 강제수용소로 부터 구하기 위해 피신시킨 네덜란드의 에히트에서 받아 들여져 아우슈비츠의 순교자로 마감되었다. 1942년7월 26일 네덜란드의 가톨릭 주교회의는 전 지역의 미사에서 독일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과 만행, 유다인들의 강제수용소행(行)을 폭로하는 강론을 했고, 곧 그에 대한 보복으로 나치는 네덜란드의 유다계 가톨릭 개종자 20명을 연행해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는데, 에디트 슈타인과 그의 언니 로사 슈타인이 그 중에 포함된 것이다. 8월 2일 연행, 8월 9일 가스실에서 사망 (추정).

비오11세는 1937년 3월 14일 인종차별적인 나치즘에 반대하는 교서 <Mit brennender Sorge>를 독일어로 작성했지만, 교서는 선포되지 않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교서 <Divini Redemptoris>가 같은 달 19일에 선포되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 Edith Stein 1942A
에디트 슈타인, 그의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나찌 독일에서 이방인인 유다인이 됨으로써 폐기 되었다. 그는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인식 했을 뿐만 아니라, 침묵 속에서 자신을 봉헌하며 유다인 대학살에 대한 침묵에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동행하면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사라져간 그의 정체성이고, 침묵하는 다수에게 던지는 침묵의 외침이다. 그의 영적인 여정 안에서 분열과 배제의 모든 것들이 만나 화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시성식을 둘러싼 논쟁들은 그 역사적인 상처와 여전히 두 종교간의 대화를 막아서는 신학적인 어려움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 그 어떤 영적 열매도 진통을 겪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그 고통은 늘 인간의 내면에 질문을 던진다” 고 정의한 에디트 자신의 논리에 따라 그를 사랑의 순교자로 불렀다. 그는 지난 세기의 진통을 자신 안에 받아 안았으며, 그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안에 새로운 삼천년기의 인간이 되는 희망을 출산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묵상한 글에서 에디트 슈타인은 인간의 신비를 이렇게 고백한다: “신은 또다시 우리를 그의 삶에 참여하게 하려고 사람이 되었다. 한 처음에 있었던 그 참여는 또한 마지막 맺음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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