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14]

셋째 다나가 태어난 뒤, 우리 식구는 격변의 시간을 겪어 왔다. 그 와중에 가장 큰 혼란과 갈등을 겪은 이는 역시 둘째 다랑이. 다랑이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상반되는 두 얼굴을 보여 주었는데 평소에는 '다나 이쁘다'며 볼 때마다 뽀뽀를 해댔지만 잘 때가 되면 '다나 다시 뱃속에 들어가라고 해', '다나 젖 먹이지 마'라며 심통을 부렸다. 그냥 심통 정도가 아니라 '너무 힘들어. 나 안아 줘'라고 발버둥 치며 소리 지르고 울다가 기어이 내 품을 차지하고 마는 정도의 심통 말이다.

그뿐인가. 조금만 혼을 내거나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엄마 집에 안 산다며 집을 나가 마을 할머니들 집으로 가출까지 했다. 거기 가서 과자 얻어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실컷 어린양을 부리다가 돌아와 밥 때가 되면 밥은 안 먹는다. 누워서 밥상을 발로 탁탁 건드리면서 엄마 아빠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다.

달걀부침이나 생선구이 같은 반찬으로 다랑이를 밥상 앞에 붙들어 보려고 애도 써봤지만 반찬만 달랑 집어 먹고 밥은 본체만체하니 얼마나 얄미운지.... 지금껏 한 번도 밥 제대로 먹어라 소릴 해본 적이 없는데(그 정도로 밥을 예쁘게 잘 먹었다) 정말 딴 아이가 되어 엄마 속을 썩이니 그 앞에서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었다. 거의 하루종일 젖 먹이느라 지쳐, 다랑이 때문에 마음 쓰느라 힘들어, 거기에다 다랑이를 혼내 준다며 나서서 결국 더 큰 소동이 벌어지게 만드는 다울이 때문에 괴로워.... 때때로 나는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다울이가 몹시 들떠서 나에게 다가왔다.

"엄마, 손 좀 내밀어 봐."
"왜?"
"내가 선물을 따왔어. 딸기 선물.... 오줌 싸러 갔다가 딸기 익었나 안 익었나 한번 봤더니 진짜 크고 빨갛게 익은 게 있더라. 이건 엄마가 먹어야 돼."
"와.... 이제 딸기가 익기 시작했구나. 엄마는 괜찮으니 너 먹어."
"안 돼. 엄마가 먹어야 딸기 맛 쭈쭈가 나와서 다나도 먹지. 나는 조금 빨갛게 된 거 몇 개 따 먹었어."

▲ 아이들이 따온 딸기 ⓒ정청라

그러면서 빨갛게 잘 익은 딸기 두 알을 내미는 거다. 한 알만 먹을 테니 나눠 먹자고 해도 굳이 자기는 괜찮다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내가 딸기를 입에 넣는 것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옆에서 '나도 먹을래'라며 달려드는 다랑이를 '형아가 또 따 줄게, 딸기밭에 가자'라며 타일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의젓한 모습까지 보이면서 말이다. 자기도 얼마나 먹고 싶었을 텐데 내게 가져 와 입에 넣어 주다니.... 딸기 향이 입안 가득 번지는 것을 느끼며 가슴이 뭉클했다.

▲ 딸기밭 앞에 딸기 원두막을 짓고 딸기 먹는 아이들 ⓒ정청라
그렇다. 내가 먹은 딸기는 그냥 딸기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온 딸기다. 어쩌다 밖에 나가 과일 가게에서 딸기를 보면 아이들은 먹고 싶어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 밭에서 딸기를 따 먹을 수 있을 테니 기다리자고, 지금 나오는 딸기는 보기만 좋지 진짜 딸기가 아니라고.... 그러면서 <딸기밭의 요정 할머니>란 책을 읽으며 진짜 딸기는 책 속에서처럼 땅속에 사는 요정 할머니가 하나씩 빨갛게 색칠을 해서 익는 것인데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는 건 빨리 크고 빨리 익으라고 약을 뿌린다고 둘러댔다.

엄마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아이들은 그렇게 딸기를 기다렸다. 덩굴이 번지고, 꽃이 피고, 초록빛 꼬마 열매가 맺히고, 그 딸기가 커져서 조금씩 빨개질 때까지.... 앞집 할머니는 딸기 알이 너무 작다며 사 먹고 말지 땅 아깝게 왜 키우냐고 하셨지만 우린 꿋꿋하게 지켜보며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심 딸기밭에 거는 기대 따윈 없었다. 특별히 거름을 하지도 않아, 풀을 매주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딸기가 열리면 얼마나 열리겠냐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아 간식거리 궁한 철에 효녀 노릇을 하게 될 줄이야! 물론 시중에 파는 딸기에 비하면 알이 아주 작지만(심지어 쥐눈이콩알만 한 딸기도 있다) 맛은 아주 진하다. 새콤달콤 부드럽고 향긋하기까지!!! 어쩌면 그간의 기다림이 더욱 깊은 맛을 선물하는 건지도 모른다.

요즘 다울이 다랑이는 참새가 방앗간 찾듯이 딸기밭에 드나든다. 딸기밭 요정 할머니가 점점 더 색칠 작업에 박차를 가하시는지 한 주먹씩 따 먹던 딸기는 어느새 국그릇 한 사발 정도씩, 작은 바가지로 수북이.... 날마다 늘고 있다. 그야말로 딸기밭에 붙이 난 것이다. 그 덕분에 오랫동안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툭 하면 가출을 하던 다랑이가 돌아왔다. 우리 집 간식 밥상도 몰라보게 상큼해졌고, 나는 날마다 다나에게 딸기맛 쭈쭈를 먹일 수도 있게 되었다. 오빠들이 따다 준 딸기를 엄마가 먹고 그것으로 만드는 쭈쭈니 다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 오늘은 딸기를 한꺼번에 이만큼이나 땄어요! 다울이는 딸기 손질 중.... ⓒ정청라

오랜 기다림이 이렇게 큰 행복으로 번지는 것을 보면 기다리길 참 잘했다, 앞으로도 기꺼이 기다리며 '행복은 딸기밭을 바라보며 딸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하리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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