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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실 리포트[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48]

메리가 아팠다. 해열제도 소용없는 고열과 통증, 물 한 모금조차 모조리 토하는 극심한 탈수 증상을 보고 의사는 장염이라고 진단했다. 그때부터 병원 입원실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메리의 병간호는 내가 전담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나는 엄마인데다 다년간에 걸쳐 입원 환자(메리와 욜라) 간호 경력이 꽤 되는 것도 주요하게 작용했으며 무엇보다 내게는 메리가 병마와 싸워 이기도록 돕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까닭이었다.

아이가 입원했을 때 간호는 크게 주간 간호와 야간 간호로 나뉜다. 주간 간호는 앓는 아이의 통증 정도와 체온 변화를 수시로 체크하는 것 외에도 주삿바늘로 들어가는 링거액 예의 주시하기와 약 먹이기, 밥 먹이기, 똥오줌 수발 들기와 말벗 해주기와 같은 임무가 주어진다. 야간 간호는 주간보다 난이도가 높다. 야간에는 주간에 비해 할 일이 많은 건 아니지만 밤에는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이 상당하다. 병실의 온도와 습도, 섀시 틈새의 외풍 정도를 점검하여 아이가 푹 잘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할 뿐 아니라, 옆 환자의 앓는 소리나 보호자들이 화장실에 들락거리며 물 내리는 소리를 밤새 들으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이가 자다가 내는 ‘으음’하는 소리를 놓치지 말고 살펴야 하고 발로 계속 차내는 이불은 ‘밤을 새서’ 다시 덮어 주어야 한다. 보호자용 매트리스에 새우처럼 모로 누워 있다가도 간호사가 한 시간 단위로 찾아올 때마다 상체 정도는 일으켜 세우는 성의를 보이는 것도 보호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 대개 입원 2일차까지는 잠을 설친다기보다 불침번을 선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 시각, 시골집에서 욜라와 로를 보며 살림을 하고 계신 시어머니와 돈 버는 역할을 맡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면, 병간호만 어렵다고 할 것은 아니었다. 아니, 굳이 비교를 하자면 불편한 병원 생활이 집에서의 일상생활보다는 덜 피곤한 편이다. 아이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으로 밤낮 이어지는 병간호라 할 지라도 오롯이 아이 한 명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더구나 나는 ‘자신의 몸도 돌보면서’ 아이를 간호하라는 타인의 충고가 무색하도록 밥을 아주 잘 먹고 하루하루를 음미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입원 첫날 아파서 물 한 모금도 못 넘기는 메리 옆에서 대형 햄버거 세트를 먹어 치우는가 하면 김밥 한 줄이 모자라 반 줄을 더 먹은 비정한 엄마가 바로 나였다! 초, 중,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을 가면 낯선 곳, 낯선 음식에도 군말 않고 잘 자고 잘 먹는 아이였던 나로선 병원이라고 식음을 전폐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메리의 상태가 위중했던 것에 비해 나의 식욕과 소화력이 눈치 없이 왕성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풀잎에 맺힌 이슬만 먹어 볼까도 했지만, 이 도심 속 빌딩 숲 어딜 가서 풀잎 위 이슬을 찾겠는가, 그것도 미세 먼지 속 중금속이 검출되지 않는 깨끗한 이슬을. 그래서 이슬을 대신해 맛없기로 악명 높은 병원 보호자 식사를 먹으며 초췌하고 힘겨운 시간을 가지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병원 밥의 겸손한 차림새와 현란하지 않은 맛은 내 맘에 쏙 들었다. 그렇게 병원 밥을 먹고 메리의 시중을 들고 아픈 탓으로 더 까칠해진 메리의 비위를 맞추는 데 힘을 쓰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욜라와 로를 보고 계신 시어머니에겐 비밀이지만(나는 병 수발하느라 고생 중인 며느리 캐릭터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바삐 집에 가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병원 생활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갔다. 메리가 먹을 수 있게 되고 병세에 차도를 보이고 나서부턴 옆 침대의 꼬마 환자들이랑 맛있는 것도 바꿔 먹으며 친해졌는데, 그 꼬마 환자들이란 메리와 같은 증상으로 입원한 8살 남자아이와 5살 여자아이다. 남자아이는 누구나 ‘예쁘다’는 감탄을 하고 지나갈 만큼 빼어난 외모를 가진 꽃미남이었고, 여자아이는 입만 열면 높임말로 ‘감사합니다’, ‘좋아요’같은 사랑스러운 말을 쏟아 내는 꼬마 요정이었다. 두 아이를 간호하는 보호자는 할머니들이었다. 꽃미남은 외할머니가, 꼬마 요정은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번갈아 가면서 아이를 보살피고 병원에서 잠도 자고 그랬다. 그런데 할머니들과의 수다를 통해 밝혀진 바, 당신들의 딸이자 며느리인 ‘애 키우는 엄마’들이 살림에서부터 아이들 양육까지 당신들의 시간과 체력의 희생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는 통에 참으로 고단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 또한 보조 양육자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때로는 불가능에 가까운지 알고 있기에 할머니들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네들의 딸과 며느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엄마들의 평범한 모습 중 하나였고 나 또한 욜라와 로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나온 처지였으니까. 그 시각 엄마 없이 지내는 욜라와 로, 그리고 시어머니의 안부를 생각 안 할 수 없었는데, 마침 집으로부터 “욜라는 아마도 ‘말썽의, 말썽에 의한, 말썽을 위한’ 말썽쟁이임에 분명하며, 로는 ‘애를 보느니 밭을 간다’라던가 ‘200만 원 받고 애 보느니 100만 원 받아도 노가다를 뛴다’와 같은 항간의 견해를 개인적 견해로 굳히게끔 하는 아이다”와 같은 전갈이 날아들었다. 상황이 어떨지 안 봐도 훤했다. 이쯤 되면 안락한 병원 생활을 빨리 청산하고 어서 집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 법도 한데,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쉬어 보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쩌랴.... 나중에 메리가 나흘 만에 서둘러 퇴원을 할 때도 ‘이왕 건강이 회복세에 접어든 이상, 하루만 더 있다 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그 전날 합류한 남편과 동시에 했다는 것은 일상의 육아 현장이 얼마나 치열한지 보여 주는 하나의 예라고 하겠다. 아무튼 요즘 세상에 하나를 키우든 둘을 키우든 셋 이상을 키우든 각자 100퍼센트로 힘든 아이 키우기의 현장에서 과연 달인이 있기나 할까. 내가 보기엔 그저 ‘귀여운 자기 주장’을 하는 병실의 5살 여자아이를 두고 ‘고집 피우고, 떼쓴다’고 아이 엉덩이를 두들겨 패던 아이의 엄마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우리 메리, 욜라, 로 세 아이 중 아무나 한 명을 ‘체험’하게 한다면 어떨까 생각했던 나도, 돌아서서 내 아이에게는 순식간에 평정심을 잃고 화를 버럭 내는 부족한 엄마에 불과하다.

그래도 부모는 아이가 아플 때는 인내심을 좀 더 발휘한다. 아이가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그것 말고는 아이에 대해 아무런 소원이 없겠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품게 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이런 낌새를 아이가 금방 알아차리는 게 문제다. 메리도 매우 아픈 와중에도 병원 앞 머리핀 장사가 왔다고 구경 가자더니 가판대를 두 번 샅샅이 훑으며 머리핀을 있는 대로 고르질 않나, 평소에는 구매 불가하여 사달라고 말도 못 꺼내는 품목인 만화캐릭터로 포장된 설탕물 음료수를 사 달라고 조르고(두 병이나 사 줬다), 일주일에 두세 번 한 시간 정도 보여 줄까 말까한 만화 영화를 보고 싶은 만큼(입원실 텔레비전은 종일 켜 놓는 것이 관례화 돼 있어 함부로 끌 수 없다) 보았다. 이런 지경이라 흔히 아이가 아픈 뒤에 버르장머리가 없어져서 이를 바로잡느라 골치를 썩는 엄마가 꽤 있다고 들었다. 그중에서 메리와 욜라가 입원을 할 때마다 병실 곳곳에서 보게 되는 걱정스러운 광경이 있다. 아이들의 과도한 스마트 기기 노출과 사용, 나는 그것을 골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 (이미지 출처 = publicdomainpictures.net)
나이가 어린 아이들의 입원 생활을 보자면 아침에는 아이를 잠에서 깨우기 위해, 밥을 먹일 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하기 위해, 수시로 심심함과 울음을 달래기 위해 엄마들은 아이 얼굴 앞에 스마트폰을 갖다 주었다. 아이들은 움직이는 화면과 소리에 정신을 빼앗긴 채 입원 생활 중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영상물 시청으로 보내곤 했다. 처음엔 일부 엄마와 아이들의 모습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어딜 가나 풍경은 비슷했다. 초등 연령대의 아이들은 주로 어른들의 의사에 반해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 아이들에게 텔레비전은 다소 시시한 것인 듯 했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인터넷에 접속이 되는 스마트 기기. 그 중에서도 휴대성과 성능을 보자면 단연 스마트폰이 압도적이다.

우리 병실의 8살 꽃미남 환자도 종일 자신의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5살 꼬마 공주는 종일 텔레비전을 시청했으며(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텔레비전이 더 잘 보이는 위치로 침대를 옮기기까지 하며 아이의 텔레비전 시청을 지원했다), 놀랍게도 어린이용 컴퓨터(주로 어린이 동영상을 틀어 보는 용도로 터치식으로 작동시키는 미니컴퓨터)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꽃미남은 자신의 스마트폰 배터리가 나가려고 할 때마다 자기를 돌봐 주는 할머니한테 짜증을 냈고 꼬마 요정도 텔레비전을 볼 때는 엄마가 간대도 나 몰라라고, ‘안녕! 안녕!’하고 크게 말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마 이대로라면 꽃미남은 언젠간 안구건조증에 거북목 증후군으로 미모가 퇴색되고, 방아쇠수지증후군까지 걸려 엄지손가락을 딸깍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접속된 보지 말아야 할 것(주로 성인 콘텐츠)을 보고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뿐 아니라 이미 고도 자극에 적응된 아이의 뇌는 시각적 자극이 적은 독서나 놀이에 지루함을 느끼고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학업을 수행하고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 꼬마 요정도 지금은 열혈 텔레비전 시청자에 불과하지만 엄마가 장만해 준 스마트 기기의 예비 사용자로 언젠간 자신이 직접 그 기기를 켜고 작동시키며 그것에 더욱 집착하게 될 게 뻔하다. 그때서야 엄마는 아이에게 ‘그만 좀 하라’고 소리칠 테지만 애시당초 아이의 손에 스마트 기기를 쥐어 준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그보다 앞서 아이가 한두 살 때부터 아이를 달래고 재밌게 해 주려고 스마트폰을 통한 영상물을 적극적으로 보여 준 자가 바로 자신임을 먼저 반성해야 한다. 문제되는 사태를 바로 잡기 위해선 과감한 결단과 노력, 솔선수범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아이가 초등학교에만 들어가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 친구들 간의 소통과 놀이에서 왕따를 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현직 초등학교 교사가 증언하는 기가 찬 세상인데. 그러기에 엄마들은 아이들의 등하교, 등하원 길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은 이유 뿐 아니라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는 경우를 걱정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스마트폰을 사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메리도 유치원 친구 중 한 명이 키즈폰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도 그게 갖고 싶다고 애원한 지 꽤 되었다. 아무리 단호하고 논리적으로 거절해도 갖고 싶은 마음은 멈춰지지 않는지 최근엔 자기가 원하는 키즈폰의 특징과 디자인을 구체적으로 적은 구구절절한 편지를 내게 보내며 압박을 한다. 통신업체들이 발 빠르게 어린이 전용 스마트폰을 내놓은 것은 한편으론 다행이지만 결국 그것이 나중 스마트폰의 잠재 고객을 양성하는 상술이라고 보면 이 정돈 괜찮겠지 하고 아이에게 제한된 기능의 어린이용 스마트폰이라도 쉽게 사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아이가 캐릭터가 그려진 손목시계 모양의 스마트폰을 언제까지 차고 다닐 수 있을까. 그 다음엔 더 재밌고 더 자극적인 무엇을 요구할까. 그래도 한동안 스마트폰을 아이 손에 들려 주지 않겠다는 내 입장은 변함이 없겠지만 그것을 언제까지 미룰 수 있을지, 언제 아이와 그 부분에 대해서 협상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메리가 입원을 한 나흘 동안 나는 그저 줄곧 스마트폰을 보느라 고개 숙인 꽃미남의 예쁜 얼굴을 한 번 더 보고팠고, 넋을 잃고 텔레비전을 보느라 말을 잃은 꼬마 요정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어 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도 지루한 병상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찾는 아이들을 비롯해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아이들이 위험한 중독과 부작용 없는 환경에서 ‘건강하고 지혜롭게’ 성장하길 간절히 바랐을 뿐이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4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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