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식의 포토에세이]

▲ '김의기', 작가 미상, 1983. ⓒ장영식

1980년 5월, 광주에서 역사의 진보와 반동 사이에서 끔찍한 죽임의 행렬이 시작됐다. “왜 광주였을까?”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5월 광주의 뜨거운 맹세는 그 뒤로도 많은 의로운 이들을 고뇌와 방랑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5월 광주민중항쟁이 진압된 때, 한국 사회는 총과 칼 앞에 오랜 침묵이 지배하던 암흑의 시기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의로운 시민과 학생들이 참혹하게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던 김의기는 고립된 도시 광주를 알리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광주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과 작성한 유인물을 선배와 친구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운명의 5월 30일 오후 5시경,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 창문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란 유인물이 뿌려졌다. 곧이어 “쿵”하는 소리가 들렸고, 두 대의 장갑차 사이에 한 청년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가 바로 김의기였다. 당시 서강대 무역학과 학생이었으며, 22세의 청년이었다.

 

경북 영주 출신의 김의기는 4남 2녀 중 막내였다. 김의기는 한국의 구조적 모순의 핵심이 농촌에 있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농활에 열심이었다. 광주민중항쟁 시기에 김의기는 함평고구마사건 보고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로 갔다. 그러나 보고회는 첫 날부터 광주민중항쟁으로 취소되었다. 이때 동화작가인 윤기현이 김의기에게 고립된 광주 소식을 알려야 한다며 서울로 가기를 권했던 것이다. 윤기현 작가는 김의기의 죽음에 대해 전혀 몰랐고, 6월 중순이 되어서야 그의 죽음을 알고서 서울로 보낸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한다.

김의기의 죽음 뒤에 식구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머니는 민주투사로 변했다. 11년 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가 주최하는 집회에 참가하며 아들의 의로운 뜻을 이어갔다. 한학자 집안의 유생이며 한량이었던 아버지는 파출소 지서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이주했지만, 퇴직금을 지인에게 빌려주고 떼임을 당해 어머니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셨고, 일꾼들에게 밥해주는 일을 하면서 지문이 닳아 주민등록증에 지문을 찍지 못하고 손바닥을 찍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유가족협의회의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어머니는 똑똑했던 막내아들의 죽음을 통해 삶 전체가 바뀌었다. 또한 아들의 죽음과 기독교 신앙 그리고 집회 현장의 결합을 통해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과 의식이 깊고 넓게 확장됐다. 2005년 8월, 어머니는 뇌출혈로 6개월의 병상생활 끝에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막내아들 곁으로 가셨다.

▲ 막내 아들 김의기 열사의 어머니이신 권채봉 여사의 생전 모습. (사진 제공 = 박철 목사)

세 살 터울 막내누나 김주숙(60) 씨는 가정 형편 때문에 고교를 나와 직장에 다녔지만, 동생이 살았을 때의 발자취를 걸어갔다. 그는 “내 동생이 예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여 어머니와 함께 동생이 다니던 형제교회에서 예수의 삶을 공부했다. 그러나 예수를 더 알고 싶은 갈망으로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신학대학에서 지금의 남편인 박철(61) 목사를 만났다. 그의 말을 빌리면 “새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며 “참 재밌게 다녔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동생의 모습을, 농촌목회를 꿈꾸던 건장하고 잘생긴 박철 목사에게서 재발견한 것이다. 실제 이 부부는 강원도와 강화도 등지에서 20년을 지낸 뒤 13년 전부터 부산에서 목회하며 예수의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박철 목사는 부산시 동구 수정동 산복도로의 좋은나무교회에서 목회하며 부산의 시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좋은나무교회는 큰 교회는 아니었지만, 가난한 동네의 작은 교회 담임 목사로서 목회에 헌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도 교회의 한계와 자신이 꿈꾸던 가난한 교회의 모습을 실천하기 위해 좋은나무교회를 스스로 박차고 나와 좁은길교회를 개척했다. 좁은길교회는 지역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이웃에게 열려있는 교회, 실천하는 교회를 꿈꾸고 있다.

▲ 김의기 열사의 누나 김주숙 씨와 박철 목사의 모습. 박철 목사는 김의기 열사가 살아 있었다면, 처남을 떠나 참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장영식

김주숙 씨는 목회자로서의 남편의 길을 존중하며, 고생스럽지만 남편의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요양보호사 과정을 이수하고, 요양보호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양보호사의 길이 힘들고 때로는 작은 몸에 부치지만, 자신의 손길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 이들의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한다.

김주숙 씨는 동생 의기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글썽인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36년이 흘렀건만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김주숙 씨는 동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행복의 절반”이라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기는 늘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그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누나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양복과 구두를 사주었건만 그는 “사람이 편해지면 더 편해지고 싶어 도둑 같은 마음이 생긴다”며 양복과 구두를 멀리했다고 한다. 누나가 사주었던 양복과 구두는 그의 시신과 함께 영원히 땅에 묻혔다.

▲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김의기 열사의 묘. ⓒ장영식

김의기 생전의 사진 한 점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경찰이 들이닥쳐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우리 곁에 5월 정신의 등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역사의 진보는 더디고, 역사의 반동은 가혹하다는 사실을 1960년 4월과 1961년 5월 쿠데타를 통해 배웠고, 1979년 10월과 1980년 5월을 통해서도 배웠다. 또한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를 지나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통해서도 절절히 배우고 익히고 있다. 역사의 진보와 반동 사이에서 김의기의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다시 읽으며 아직은 서러운 반동의 5월을 보낸다.

장영식(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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