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언니, 가톨릭에서는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면서요?"
가톨릭 학생회에 갓 들어온 스무 살 여자 후배가 물었다.
"그렇지. 그런데 너는 신자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한다?"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냥 가톨릭이니까 그렇게 가르치겠거니 싶었어요."

그 친구를 당장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보다 앞서 밀려온 뒷통수 맞은 듯한 느낌에 멍해졌다. 그래. 우리는 왜 지금껏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 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을까. 우리는 어디에서 이런 걸 들을 수 있지? 후배에게 주모임에서 꼭 이 이야기를 해보자고 말하며 동아리방에 있는 YOUCAT(가톨릭 청년교리서)을 읽어 보라고 했다. 그게 당장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게 벌써 3년 전 일이다. 그리고 3년 동안 꾸준히 이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뭔가를 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라고 뭘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2012년에 대만에서 열렸던 동아시아 가톨릭학생회 모임 중에 한 일본 학생이 이런 교리서가 있다며 소개해 준 YOUCAT이라는 책을 우연히 얻게 되었고, 호기심에 열심히 읽은 덕분에 그 ‘왜’에 대한 답변은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만약에 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사실 잘 몰랐을 것 같다. 앞으로도 몰랐을 것 같다.

청년 신앙인의 삶과 신앙의 일치

▲ (사진 출처 = flickr.com)
우리 가톨릭 학생회는 삶과 신앙의 일치를 중요한 방향성으로 두고 있다. 가톨릭 학생회 선언문의 첫 문장도 ‘우리는 삶과 신앙의 일치를 이룬다’고, 올해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의 60대 기조도 ‘삶과 신앙의 일치, 하나됨을 위하여’다. 2012년부터의 대학생활을 바탕으로, 4-5년간의 가톨릭 학생회 활동으로 생각해 보건대 청년 신앙인으로서 삶과 신앙의 일치를 위해, '성'은 정말 큰 부분으로 두어야 한다. 이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나누고 가르침 받아야 한다. 지금껏 없었다. 그럴 만한 자리가, 행사가 딱히 없었던 것도 원인이지만 이것을 꼭 다뤄야 할 의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교리라고는 초등학교 시절 첫 영성체 때, 중학교 시절 견진성사 때 받은 게 전부인데 나는 언제 어떤 식으로 교회로부터 성과 생명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는가? 꾸준히 성당 활동을 했지만 딱히 없었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 혹은 신부님 수녀님과 열띤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다. 성에 대해 식사 때나 모임 중에, 혹은 커피를 마시면서 활발하게 이야기 나눈다? 아니다. 성은 여전히 깜깜한 음지의 영역이다. 특히 성당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사실 참 다루기 힘든 소재고 얼마나 솔직하게 드러내야 하나 고민되는 문제기도 하다. 그동안의 대학 생활 속에서 느끼기에 지금은 ‘혼전 순결’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기가 참 힘든 시대다. 또한 우리가 가톨릭 신자라 해서 현대의 성문화와 달리 간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회장을 하던 때, 한번은 그런 현실에 대한 답답함에 주모임을 통해 이 주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우리는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반반이었다. 결혼 연령이 점점 늦춰지고 있는데 혼전 순결을 지키라고 하면 거의 서른까지 순결을 유지하라는 것인데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피임 도구로 충분히 임신을 막을 수 있다. 낙태는 안 되지만 섹스는 괜찮다. 책임감 있게 행동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이것이 반대 쪽의 주장이었다.

왜 교회는 순결을 말하는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교회는 왜 혼전 순결을 말하는가? 교회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결합한 수정란부터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 수정란이 착상을 하지 않아도,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 손과 발이 세포분열을 하지 않아도 이미 수정란은 하나의 생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관계 그 자체가 생명과 직결된다. 혼전 순결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성관계 자체가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응급피임약과 체외 인공수정을 반대하는 이유도 같은 원리다. 응급피임약은 호르몬에 변화를 주어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낙태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고, 인공수정은 몇 개의 수정란을 만든 뒤 그 중 건강한 것을 골라 착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인공’수정이라는 것과 더불어 그 과정 속에 낙태가 일어나는 이유로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 (사진 출처 = pixabay.com)

이보다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전제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3). 모든 생명의 탄생에는 그분의 뜻이 담겨 있다. 인간의 능력과 뜻만으로는 생명의 잉태가 불가능하다. 이런 생명의 신비를 사람이 피임 도구를 이용해 조절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행위다. 여기부터는 많이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면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 준다. 피임성공률이 콘돔은 약 85퍼센트, 자궁내 장치나 피임약은 99퍼센트라고 한다. 여러 가지 피임 기술이 피임성공률을 100퍼센트에 가깝게 만들어 준다지만 100퍼센트는 없다. 백 번 중에 한 번은 피임에 성공하지 못한다. 백 번 중에 한 번은 원하지 않는 아기를 임신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 희박한 가능성 때문에 순결을 지키라고? 그렇다. 이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단 하나의 아기라도 낙태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게 1퍼센트든 0.1퍼센트든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당연히'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나는 타협이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과 관련된 한 타협할 수 없었다. 생명마저 타협해 버린다면 나의 신앙은, 내가 믿는 종교는 아무 것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것은 시대착오적 신념일까, 현대판 순교일까

이 신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가끔 힘겨운 싸움처럼 느껴진다. 사실 내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까, 교회가 이 세상과 지금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고민이 든다. 나의 지식도 턱없이 부족하고, 이 신념을 계속 지키려면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 것인지, 지칠 때가 많다. 이제는 성교육 시간에 임신의 원리나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보다는 올바른 피임법을 가르치는 게 맞는 것일까? '그럼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은 어쩔 겁니까? 피해자는 그래도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해 여전히 당당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다가 나 역시 그 문제를 저 아래 음지로 묻어 두곤 했다. 그래, 내 신념은 나만 잘 지키고 살면 되는 거지. 하지만 마음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 왔다. 옳은 일을 위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도 순교가 아닐까? 그게 삶과 신앙의 일치를 외치는 젊은이의 소명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고민이 많다. 주변 사람에게도 잘 하지 못하던 말들을 이렇게 글로 써내려니 솔직히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이 글을 통해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이다. 길가에 지나가는 예쁜 아기들을 보며 미소 짓는 그 보편적 감수성이 태 속에서 아무런 방어 능력 없이 자신의 부모로부터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에게도 작용할 수는 없을까. 그 때문에 쾌락보다는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다시 생각하고 바꾸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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