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사진 제공 = 영화사 찬란)
쥘리에트 비노슈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서사가 가슴에 스며드는 듯한 작품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L'attesa, The Wait, 2015)은 한마디로 빛과 숨의 영화였다. 말해지지 않은 것, 말하려야 말할 수 없는 것, 말해도 붙잡을 수 없는 것들까지 빛과 어둠 그리고 침묵 속에서 반짝이고 흩어지다 어느 결에 자리를 잡아 갔다. 혹은 공기 중으로 아득히 사라지기도 했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과 숨이 쉬어지지 않는 상실감과 불안, 그 파동 속에서 견디고 견디는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들. 시간은 흘러도 흐르지 않고, 눈물은 말라도 마르지 않는다. 그의 부재만을 확인해야 하는 남아 있는 날들. 가슴이 미어지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할 사랑하는 이.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이. 그럼에도 기다리는 일 외에 남겨진 자에게 할 일은 없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고요한 저택에 사는 안나. 영화는 첫 장면부터 극도의 슬픔으로 짓눌린 듯한 장례식을 보여준다. 살았다고 할 수 없을 표정의 검은 상복의 여인은 모든 빛이 차단된 검은 휘장뿐인 집에 죽은 듯이 누워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 주세페의 여자친구 잔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없다. 첫 통화에서 나온 몇 가지 정보는, 잔이 도착하고 영화가 진행되어도 별로 진전이 없다.
“그 애는 지금 없어. 난 그 애 엄마야. 들르렴, 기다릴게.”

▲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사진 제공 = 영화사 찬란)

고통스러운 비밀을 안은 안나와 애인의 무소식에 상심하고 힘겨워 하는 잔. 뭍과 물처럼 막막해 보이던 두 사람 사이가 서서히 친밀해지면서, 무엇보다 안나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안나는 잔을 위해 정성껏 요리한다. 온통 검은 휘장으로 막아 놓았던 창과 거울의 대못도 직접 빼낸다. 살아있음의 ‘색감’과 움직임을 이 저택에 불어 넣은 잔의 등장은, 안나에게는 아들의 실존을 혹은 실존했음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다. 아름다운 잔을 넋 놓고 탐색하듯 바라보는 안나의 표정은 참으로 복잡 다단하다. 아들이 사랑했을 그 육체를 눈으로 더듬고 안고 보내 주는 과정이 안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절차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침내 주세페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 부활절이 다가온다. 부활 전야의 거리 축제를 전후로 그 칠흑 같은 깜깜한 밤을 건너며 마치 영원처럼 긴긴밤과 새벽 사이에서 안나와 잔은, 결국 각자의 기다림에 대한 답을 얻는다. 기다림의 끝에는 그리움이 있을까. 새로운 나날은 올까. 두 사람의 눈물 어린 교감이 뭉클하고도 가슴 아프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안다. 그 ‘열어둔 문’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일, 그 기다림만이 지금은 유일한 할 일이라는 것도.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보면서 필름 속에 서린 한숨들을 호흡하는 것이 유일한 감상법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장면들의 이음새와 그 한 음 한 음의 조화가 슬픔과 위안을 동시에 안겨준다.

(포스터 이미지 제공 = 영화사 찬란)
원래는 이 영화를 지난해 가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중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야외상영으로 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영화의 전당에 도착하고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바로 옆 교보문고에서 동생과 시간을 보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읽으며 말없이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제목을 보는 순간 가슴에 새겨질 것 같던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게 해를 넘겨 올봄에야 보게 되었다.

그때는, 차마 이 영화를 볼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호와 함께 캄캄하기만 한 어둠 속이던 그 가을엔,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려야 하는 일만 남았던 그때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제목은 아름다워서 처절한 형벌 같았다. 그럼에도 이제 이 영화를 떠올리면, 해운대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먼저 연상된다. 지난 10월의 부산국제영화제와 그 바다, 사랑하기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 어쩌면 올가을에는 2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이라고 한다. 그때 내가 들었던 그 파도 소리는 꿈이었을까. 그래도 잊을 수 없다.

2012년 4월부터 쓰기 시작한 ‘리얼몽상’의 마지막 원고를 쓰고 있다. 내내 부족했고 지금도 부족하지만, 쓰는 동안 함께 이 공간을 채워 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희망을 믿고 싶다.

4년 동안 꾸준히 '김원의 리얼몽상'을 맡아 주신 김원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김원(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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