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자 2645호 <가톨릭신문>과 1016호 <평화신문>

평안하신지요?
지면을 통해 때때로 뵈었습니다. 오늘은 편지를 드리려고 합니다. 공개편지인 점을 양해하여 주십시오. 4월 26일자로 발행된 <가톨릭신문>의 22면에 실린 국장님의 ‘데스크 칼럼’을 잘 읽었습니다. 국장님은 칼럼의 제목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변명’이라고 겸손되이 말씀하셨지만 그 글 안에 국장님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현실 그리고 ‘존재론적 상황’이라 표현 하신 말씀을 통해 속뜻을 들려주셨습니다. 신문사 국장님의 입장에서 쓰기 쉽지 않은 글이었기에 먼저 고마운 마음으로 읽었음을 전해 드립니다.

현재 제가 편집위원 및 ‘언론과 교회’라는 꼭지를 맡고 있는 신생매체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창립을 언급하여 주셨고 새로운 매체의 탄생이 교회내부의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에 좋은 자극제가 되었으면 한다는 기대를 주셨습니다. 또한 한국교회 안에도 더욱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려야 한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라고 하신 대목에서는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교계신문을 비평하고 있는 <언론과 교회> 꼭지만 하더라도 두 신문사의 일선기자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읽기가 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평꼭지를 무슨 마음에서 시작하였고,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는 지는 또 다른 기회가 오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지난 2007년 9월 대안언론을 선언한 <지금여기>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카페형태로 시작하면서 ‘미디어 흘겨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이 86번째의 글입니다. 그러고 보니 2008년 1월경에 <가톨릭신문>의 ‘데스크 칼럼’에 “네 이웃을 흘겨보지 마라”는 글도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마도 그 때에는 흘겨봄을 당하는 불편한 심정을 다른 데스크 한 분이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국장님이 말씀한 대로 크든 작든 모든 것이 쌍방 소통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일 겁니다. 현재 천주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시선을 언론의 장에서 어떻게 접근하느냐는 쉽거나 간단한 일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국장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들의 신념과 성향만이 옳다는 억지”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함에 동의합니다. 국장님은 그런 모습이 속상하다고 토로했습니다. 혹시라도 신생매체인 <지금여기>가, 좁게는 제가 하고 있는 언론비평이 그리 보였다면 경험보다는 의욕이 앞선 이유일 것입니다. 또한 그 역시 다양함의 관점이라 관용하여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촛불이며, 오체투지며, 용산참사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너무 숨 가쁘다면 이번 주 신문에 나온 것만 잠시 보았으면 합니다. 4월 26일자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에서는 독일의 6개 교구 주교단이 수원과 제주교구를 방문하였고 소공동체 체험을 하였다고 상세히 전해주었습니다. 두 신문 모두 1면 스트레이트 기사를 비롯해 <가톨릭신문>은 7면 전면을 할애하였고, <평화신문>은 10면, 11면 전면을 통해 보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여기>는 제휴사인 <제주의 소리> 기사를 제공받아 독일 주교단이 강우일 주교의 안내로 제주 ‘4․3(항쟁)평화기념관’을 방문한 사실과 독일 역시 전쟁의 아픔을 겪은 경험자로서 제주지역 아픔의 역사에 대해 공감한 것을 소공동체 체험과 더불어 병행하여 보도 한 바 있습니다.

또한 <가톨릭신문>은 4면에서 황사영백서를 필사한 어느 본당 사목회장의 기사를 보도하였습니다. 기사본문에서 필사자는 “황사영백서가 많은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국장님이 알다시피 황사영백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상당히 많은 논란을 품고 있는 문제입니다. <가톨릭신문>만 하더라도 ‘황사영백서’에 대해서 많은 보도가 있었으며 “황사영을 신화화해서는 안 된다. 그의 종교적 정체성에 비해서 민족적 정체성의 성숙도는 제한되어 있었다”(2006.4.16 황종렬: 자기 정체성에 대한 충실과 역사 이해-황사영 백서사건을 일례로)란 연속기획물이 있었고, 황사영 순교자가 말한 ‘큰 선박을 불러들인[請來大舶]’ 의미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여 매국자와 순교자 사이에 우리의 논의는 위험하게 걸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역사는 역사이고 백서필사는 필사라는 일면 치중 보도는 교회언론의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너의 그림자가 나의 실체이고, 나의 그림자가 너의 실체라고들 이야기 합니다. 뒤집어보면 기존의 교회언론이나 대안언론이 같은 것을 다른 음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사람 하는 일이 뭐 그리 차이가 날 것이며, 호 불호며 잘 잘못이 따로 있겠습니까? 국장님이 말씀하다가 말을 아끼신 “어떤 판단과 선택이 더 ‘교회적’인가하는 고민”을 함께 하겠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누가 교회이며, 무엇이 교회인지 함께 품었으면 합니다. 이천 여 년 전 나자렛 사람 예수가 그토록 말하려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그러나 아직' 이라는 마음은 서로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새로운 교회의 언론매체에 사랑을 보내 주십시오. 귀사의 발전과 가정의 행복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두 손 모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김유철/지금여기 편집위원, 경남민언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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