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민주화-근본적 정체성 회복의 길 5.

오늘의 많은 신앙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갈등과 방황을 하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도 불투명하다. 그러나 하느님 존재에 대한 혼돈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또 신심을 포기하지 않는 듯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의 존재와 부재를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데,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내가 만일 죽어서 신의 부재가 확인된다 하더라도 내가 깨끗한 진실과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온 것은 큰 가치이다. 억울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파스칼의 고백은 의미가 있다. 마더 데레사도 인간의 비참한 삶의 현장에서 침묵의 하느님, 부재의 하느님을 묵상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신앙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이유는 다양한 과학과 인문학, 우주론, 무한대로 발전할 것 같이 흐르는 통신공학, 생명공학 등등의 인간의 두뇌를 통한 세상의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 대해 교회는 뜬 구름 속에 휘젓는 것 같은 교의를, 그것도 트리엔트 공의회(1545-63년)의 가르침을 반복 내지 재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한국천주교 청년신자들의 80%가 교회법과 교의,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에 구속력을 느끼지 않고 있고, 전근대적인 교시에는 관심이 없다고 답변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비그리스도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2천 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종교 대립의 역사는 대부분 전쟁으로 이어지며, 지금도 9·11 테러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이런 맥락에서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전쟁의 명분을 교의적인 면에서 합리화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이성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사탄의 존재·천당·지옥·악의 존재를 들어 전투적 신앙관을 사람들의 의식에 심어 놓았다. 그리스도교 초기는 이단과 대적하고(이단이란 관점도 주관적이고 아전인수 격), 중세기는 이슬람과 적대하고, 계몽시기는 무신론자와 인문주의자들과 대적하고, 근대를 넘어서는 자연과학주의·현대주의·공산주의와 대적하고, 지금은 교계제도와 성직자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세력과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교회 기득권층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회복운동, 민주회복과 통일운동을 위해 투신하면서 사회참여를 하는 성직자들에게 “세속적이다”, “정치적이다”라고 매도하고 경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회참여 운동에 교구장(주교)이 동참한 경우는 모든 주교들이 동의하고 있는 현상을 금년 제주교구 해군기지 반대운동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국가적이고 미래적인 문제였던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운동’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주교들이었다. 바로 주교 없이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사제들만이 참석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모두는 시대의 징표를 외면한 ‘게토식 신앙’이 아닐까.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충돌해야 하는 부담도 생각해야 하고, 또 주교단의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먼 훗날 역사가 증언하리라고 확신한다. 시대의 징표를 외면한 교회 위상에 대해 철학자 러셀의 비판은 혹독하다: “종교제도의 신앙은 독선적이고 잔인하고 종교(신)의 이름으로 악독한 짓을 하여왔다. 십자군전쟁, 마녀재판, 노예제도 찬성, 과학발전 매도… 등은 예수와는 무관한 교권의 횡포다. 시대의 징표를 보고 읽고, 수렴하지 않으면 교회도 골동품이 될 것이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인지하고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피력한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이다. 필자가 2004년 모 교구 총회장단(180명 참석) 연수회에 강사로 초대되어 강의 중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 대한 서적을 읽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5%(9명)만이 응답하는 것을 보고, 문득 한국의 4,200명의 사제들은 과연 공의회 문헌을 얼마나 읽고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회의를 가진 적이 있다. 공의회에 참석했던 한국의 주교들은 모두 작고했거나 현직에서 물러난 상태다. 그래서 공의회 이후 특히 1990년대 이후 성성된 한국의 주교들에게 공의회문헌을 공부했는지, 아니면 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공의회 따로, 교서 따로, 교회 따로, 민족·국가 따로, 수구·진보, 사회참여·사회참여 거부, 반대·찬성, 모두가 따로 굴러간다. 공의회 정신과 가르침이 뿌리내리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고 핑계를 대지만, 그 시간과 노력마저도 복음적 가치의 실현과정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가르침을 모르고 있는지, 아니면 무지와 아집의 소산인지 사목자(주교, 본당신부 등)의 성향에 따라 한국 신자들의 신앙 상태는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본당에서 5년간 사목하던 어떤 본당사제가 공의회 정신에 근거한 메시지(특히 사회정의와 인권, 민족통일)를 전하였다. 그런데 후임 사제가 와서 오직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힘쓰라고 메시지를 전했다.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지난 5년간 들었던 전임신부의 강론은 1개월 만에 희석되고, 영혼구원의 신심이 점차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5천명의 본당신자들은 처음에는 혼란을 느끼더니, 즉시 후임 사목자의 마인드에 길들여졌다고 한다. 이는 교구의 많은 신부들이 인사권자의 정서에 순응하느라 사회참여 사목을 포기하는 현상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이 한국교회의 사목 실상이고, 바로 반성하고 수정돼야 할 교회 내부의 시대의 징표이다.

지난 세기 교황 요한 23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지금까지의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외면하면서 존립했던 사실을 반성하면서 복음의 현대화와 세상의 징표를 안고 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통절히 느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우리는 박물관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 충만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거닐기 위해서이다.” 요한 23세는 세상에 봉사하고, 예언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먼저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읽고, 과거의 교회상을 반성하고 쇄신시켜야 한다면서, 독선적이고 어떤 비판도 거부하던 전래의 교회를 비판하면서 미래의 교회를 꿈꾸었다.

교황은 공의회를 시작하면서 세상 모두를 안을 수 있는 자세를 갖자고 천명하고 모든 안건을 협의, 논의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이렇게 언급했다: “의심스러운 것에는 자유를, 필요한 일에는 일치를, 모든 것은 사랑으로 임해야 한다. 특히 시대의 징표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올바르고 정의롭고 공동체적인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한다.”

이런 요한 23세의 공의회 정신은 추후 진행하면서 나온 교령과 헌장에 확실히 천명되었다. “시대의 징표를 인정하고 일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기를 바란다.” “신자들은 모든 선의의(일치 교령4)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회적, 정치적 여러 체제들을 어떻게 복음의 정신대로 완성할 수 있는 지를 연구해야 한다”(평신도 교령 14).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징표(특징)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사목헌장 4). “하느님의 현존과 그 계획의 참된 표지(징표)는 과연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노력한다”(사목헌장 11).

이렇게 공의회 문헌은 세상의 징표와 복음과의 불가피한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과연 한국교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부분적으로는 응답하는 움직임이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교회 자체 성장과 유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시대의 징표를 예지하고 투신하는 이들에게(사제, 평신도) 던지는 고위성직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정치적인 면에 너무 치중한다.” “군사독재 시기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나, 지금은 민주화가 정립된 상황이니 참여하지 말고, 본당사목에 전념하라.” “교황청이 안 좋게 보니 중단하라.”는 등 권고, 때로는 명령까지 하고 있다.

교회의 교정권자들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의식이 비록 전통적인 교의와는 충돌하지 않더라도 거부감을 갖고 있다. 또 내심으로는 동조하면서도 외적으로 주교단의 일치란 명목으로 반대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인 ‘시대의 징표’와 직결되는 사항까지도 불편하게 느끼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정치권의 수구세력과 별 다른 면이 없어 보인다. 사실 오늘의 민주주의 정신도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단초를 발견한다.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대두된 평등사상과 함께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평범하고 단순한 그리스도교적 인식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제도교회를 떠나는 근본 이유는, 책임적 교회의 지도자들이 매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배적이고 명령적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메시지를 교회의 이름으로 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도 현실을 살아가는 비신앙인들의 기본의식인 이기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정서와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급박한 세상의 흐름과 혼돈스런 현실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역설적으로 보다 현실적일 수 있다. 신앙의 의미가 무엇이고 왜 믿느냐는 질문에 1순위가 마음의 평화(59.7%), 내세 구원(16.3%)이라고 10년 전에 답했다. 아마 지금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라고 응답하지 않을까. 이것 또한 시대의 징표이고 인간의식의 실상이다. 또 다른 한편 금년도 신자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래에 교회가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한 이도 56.6%인데, 10년 전에는 88%였다. 이를 보면 교회가 변하는 시대의 징표에 적절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다.(가톨릭신문 2007년 4월 1일자) 이런 실제 현상에서 교회의 체질을 바꾸는 쇄신없이 2천년 전통만 내세워 교권수호만 내세운다면 보다 이른 시일에 성당은 비워지던지, 아니면 노인들의 정신적 휴식처 역할만 하게 될 것이다.

/안승길 200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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