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28]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모르던 시인데 친구가 보내 줘서 알게 되었다. 오늘 아침(4월 24일) SNS를 열어보다 접한 이 짧은 시 때문에 칼럼도 짧아지게 생겼다. 역시 시인들은 천재다. 할 말을 저 몇 마디 안에 다 담다니....

한 개인의 신앙생활도 이 시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한 개인에게 신앙은 어둠이 있을 때 빛난다. 갑작스러운 불행, 그로 인한 고통이 길어질 때 구원이 절실하다. 그러나 잘 나갈 때, 이 시에서 대낮에 있는 사람에게 신앙(혹은 종교)은 만약에 있을 불행에 대비하는 보험이나 그 사회에서 그 종교가 누리는 사회적 위신에 기대는 포장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때는 아무리 절박하려고 해도 그리 할 수 없다. 해서 이내 유약해지고 시들게 되어, 섭리보다는 자기 통장의 잔고를 믿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진한 향기를 뿜어내려 해도 온실에서 자란 약초들이 그렇듯 진한 향을 풍기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 해도 절박함은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면 신앙은 그저 몸에 밴 습관으로만 남을 뿐이다.

나무에 시련이 닥치면 옹이가 생긴다. 때로는 굽은 허리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시련을 이겨내면 사람들은 곧게 자라 찬란히 빛나는 나무보다 더 아름답다고 한다. 나무에 옹이를 만들고, 때로 허리를 휘게 하는 어둠이 인간에게 있을 때 신앙이 자란다. 타이완 신학자 송천성은 ‘신학과 신앙은 위기 속에서 자란다.’고 했다. 위대한 신학과 신앙은 한결같이 위기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한 개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사진 출처 = flickr.com)

한국 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에 대해 아는 것도 배운 것도 적은 상태에서 어찌 그리 목숨을 쉽게 내놓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해서 어떤 학자들은 이런 죽음이 과연 순수할 수 있는지, 즉 순교로서 가치가 있는지 묻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에 동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여러 풍파를 겪으며 절박한 위기 속에서는 즉, 캄캄한 어둠일 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절박함이 생긴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때는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의 순수함이 되살아난다. 모든 에고가 사라지며 철저히 섭리에만 기대는 상태가 된다. 모든 영성가들이 갈망했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때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특히 더는 버릴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죽음의 무게는 초개같아 진다. 대낮에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상태다. 이렇게 순교한 이들의 마음은 오로지 하느님만 아신다. 우리가 쉽게 순수성을 의심할 대상이 아니다.

순교 다음으로 우리 교회에 절박함을 갖게 해 준 사건은 6.25로 시작된 내전이었다.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건이자 비극이었다. 하지만 이때조차도 한쪽에서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순교 시기의 절박함에 비길 수 없다.

세 번째는 1970년대에서 80년대 중반까지 국가를 거스르며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시기다. 위기였지만 이때도 신앙의 자유가 크게 위협받지는 않았다. 아마 이 정도가 세 번째의 절박함을 갖는 사건이자 시기로 평가할 수 있을 터다.

그러다 1980년대 말부터 약 30여 년간 230년 한국 교회사에서 태평성대가 펼쳐진다. 역사상 최대의 신자 수, 최고의 사회적 위신, 최대의 사회권력, 최고의 부, 계속되는 성소, 보편 교회 안에서 높아진 위상 등의 봄날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낮 가운데서도 한낮, 앞의 시에서 말한 대낮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그늘도 그만큼 짙었다. 아무리 신앙을, 순교 정신을 말해도 절박함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20대 건강한 청춘에게 건강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온실도 부족해 이를 유리로 감싸게 된 요즘 눈비를 조심하라는 말이 절실하게 들릴 리 없다. 그래서 이 안온해진 환경을 깨는 사람은 주교든, 사제든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평화가 정상이 아니라 주장하는 순간 그는 누구든 종북좌파 낙인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순교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십자가만 기능한다. 예수님의 시대처럼 말이다. 옛날엔 원수가 밖에 있어 순교가 교회를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제는 원수가 내부에 있어 종교 전쟁 밖에 할 게 없다. 이럴 때 십자가가 기능한다. 이런 시대엔 절박함이 생길 수 없다. 기적과 섭리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신앙이 자라려면 개인이든 교회든 스스로 불안정한 상황에 뛰어들어야 한다. 스스로 가난해지고, 험지로 몸을 내던지며, 주류의 세계관에 도전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 위험할 때, 내부에서 위험시되고 내몰릴 때 신앙이 절실해진다. 그리고 더는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때 “별을 낳을 수 있다.”

해서 요즘과 같은 시대에 교회 쇄신은 일부러 이런 위기로 자신을 내던지는 일이어야 한다. 아무런 위험이 없는 곳에서는 신앙이 자라지 않으므로. 이렇게 일부러라도 자신을 위험으로 내던지지 않으면 교회의 이상도 신앙의 이상도 실현할 수 없다. 요즘 다들 쇄신을 입에 달고 살아도 전혀 쇄신되지 않는 이유다. 게다가 ‘절박함’마저 없다.

나는 이런 상황에 놓인 교회 모습을 ‘안정기 신드롬’이라 정의한 바 있다. 이때는 다음 단계인 ‘쇠퇴기’를 촉진하는 암적 요소가 무수히 자라게 된다. 잘 살아서 편안한 것이 아니고 그저 눈에 띄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 평온해 보이는 지금이 그런 때라는 말이다. 위기의 시기 못지않은 위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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