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24일(부활 제5 주일) 요한 13,31-35

오늘 복음 이야기는 배반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복음 앞은 유다의 배반이, 복음 뒤편은 베드로의 배반이 버티고 있다. 배반 사이 예수는 영광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빛이 세상에 왔고, 그 빛은 늘 빛나려 하지만, 어둠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둠이 빛을 받아들일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빛은 여전히 빛났고 지금껏 어둠 속에, 어둠이 있음에도 빛나고 있다.

요한복음의 이원론적 구도(빛/어둠, 죽음/생명, 영/육 등)는 실은 통합적 구도의 표징이고 가능태다. 오늘 복음의 ‘사람의 아들’, ‘영광’이라는 단어를 봐도 그렇다. ‘사람의 아들’은 유다 전통에서 희망의 상징이되 아픈 현실에서 기다려온 희망이었다.(에제 2,1; 다니 7,13 참조) ‘영광’이라는 말도 예수의 죽음이 엄습하는 순간에 그 완성을 고한다.(요한 17,1.5 참조) 요한복음은 대립개념을 통합개념으로, 갈라서는 것을 다시 이어붙이는 것으로 글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요한 20,31 참조)

사랑은 이런 요한복음의 목적에 부합하는 단어다. 대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드러내는 데 빠지지 않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렇다. ‘사랑은 예수의 사랑의 연속이다’(요한 15,12.17; 1요한 2,7-8; 3,11.16.23; 4,7-8.10-12.19-20; 2요한 5 참조),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이고 실천이다’(요한 14,15.21.23; 15,10.12; 1요한 5,3; 2요한 5.6; 루카 6,46), 그리하여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징이다’(1요한 3,14; 4,20) 등.

이런 말들은 지당하지만 속을 불편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하자는 데 반감을 느끼는 건 가당찮다. 다만, 나 자신이 사랑이란 말 앞에 미움, 짜증, 질투 등의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무의식의 가식 때문이다. 화라기보다 슬픔에 가까운 창피함이기도 하다.

예수가 ‘얘들아’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이런 창피는 절정에 치닫는다. ‘얘들아’로 번역된 그리스말 ‘테크논’은 친근함의 표현이다. 요한의 이야기를 듣던 초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기도 했다.(1요한 2,1.12.28; 3,7.18; 4,4; 5,21 참조) 예수가 사랑한, 예수가 가까이 두고픈 이들이 ‘얘들아’로 대변된다. 요한의 공동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사랑스러웠는지, 미움 가득했는지 모를 일이나 사람이 사는 건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다.

예수는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사랑은 미움의 반대말이 아니거니와 미움을 없앤 뒤 남아있는 우아하고 품위있는 ‘마님’의 화사한 웃음은 더더욱 아니다. 거친 삶의 흔적을 아로새긴 채 서툴게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빛으로, 사랑으로 초대되었다면, 서로 사랑하는 일은 생채기를 내더라도 어떻게든 부여잡는 서로에 대한 친근함이 되어야 한다. ‘짜슥아! 니는 맨날 그 지랄이고!’라고 하는 동기생의 말이 예수의 ‘얘들아’와 교차하여 가슴을 때린다. 지랄하든, 사랑하든, 살아있고 살아간다면, 그건 매한가지로 예수에겐 ‘애들’의 귀여움이고 사랑의 현장이다.

종교의 타락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따진 나머지 품어주는 능력을 잃어버릴 때 가장 심하게 드러난다. 화석이 된 사랑을 하느니 피 끓는 미움으로 어떻게든 서로를 고민하는 게 더 사랑스럽고 종교적이지 않겠나. 참고로 종교란, Religion, 곧 ‘다시 엮다’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기도 하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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