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꽃의 비밀'

118년이 걸린다고 한다. 임금 수준에서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남녀 임금격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등이다. 올 3월 발표된 ‘남녀 임금 격차 국가’ 지수에서 대한민국은 14년째 1위다. 어쩌면 여기서 살아가는 이들은 대개 (겪어서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실을, 수치상으로 도표로 보게 되니 새삼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2014년 기준 남녀 임금격차는 36.7퍼센트다. 남성이 1000만 원을 벌 때 여성은 633만 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OECD 평균 격차는 15.6퍼센트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여성들의 경력 단절 때문에 우리나라는 유독 심각하다. 20대에는 남녀 임금 차이가 크지 않은데, 30대 이후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경력 단절 이후, 재취업을 하는 40-50대 여성은 같은 나이의 남성들이 받는 임금의 절반 수준이다. 이 때문에 연령별 평균을 내면 전체 임금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

전체 비정규직 중 여성 비율도 54퍼센트다. 여성은 339만 명으로 전년 대비 비정규직 증가 비율도 큰 폭으로 늘었다. 남녀 임금 격차는 여성 차별의 결과다. 우선, 여성은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이 낮다. 1989년에 남녀고용평등법에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조항이 포함됐지만, 현실에서 이 조항은 거의 무력하다.

세계경제포럼이 남녀가 경제적으로 평등해질 때까지 걸릴 것으로 예상한 시간은 118년이다. 우리나라의 성평등 지수는 2015년 115위였다. 중국(91위)이나 인도(108위) 보다 못하다. 케냐(48위), 짐바브웨(57위), 가나(63위)와 비교되는 숫자를 보면 그저 입을 꾹 다물게 된다.

이 기사가 나올 즈음 대학로에서 본 연극이 ‘꽃의 비밀’이었다. 연극 ‘꽃의 비밀’은 장진의 13년 만의 신작 코미디로 네 명의 아줌마가 남편의 보험금을 타기 위해 각자의 남편으로 변장하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다. 지난해 12월 초연 이후 꾸준히 관객을 모으고 있다. 재미있다. 마음 놓고 실컷 웃게 한다.

▲ 건배하는 네 아줌마.(사진 제공 = (주)수현재컴퍼니)

배경은 이탈리아 서북부  ‘빌라 페로사’라는 작은 마을이다.(실제 그런 마을이 있는지 여부는 전혀 중요치 않다)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포도 농사를 지으며 와인 만드는 일을 한다.(물론 일은 주로 여자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죽도록 한다) 남자들은 축구에 미쳐 있고, 여자들은 모여서 수다 떠는 게 유일한 낙이다.

푼수 왕언니 소피아, 털털한 자스민, 예술학교 연기 전공자인 미모의 모니카, 공대 수석졸업생인 ‘여자 맥가이버’ 지나. 이렇게 네 아줌마의 이야기다. 축구에 환장한 남편들을 다 축구장으로 보내고 여자들끼리 즐기는 송년회 날,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고 남편들은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이 동네 남편들은 국가 보험에 가입돼 최종 승인 절차만 남았는데, 건강검진 중 하필 빠진 부분이 있어서 의사가 이 마을을 방문하겠다는 통보가 온다. 어쩔 것인가. 포기하기에는 너무 큰돈이다. 이들은 결국 고심 끝에 각자의 남편으로 남장을 한다. 겉모습은 어찌어찌 흉내 낸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를 과연 속일 수 있기는 한 것일까? 20만 유로 보험금을 위해 네 명의 여자는 발칙한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놀랍게도 이 신체검사를 통과한다. 남자인 의사는 자기가 보고 있는 네 사람이 ‘남자’라는 주어진 ‘정보’에 사로잡혀, 자기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 구체적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알아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애초에 하려던 업무를 최선을 다해 성실히 마친다. 여자들은 ‘연극’에 성공한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 남장한 네 아줌마와 주변 인물들.(사진 제공 = (주)수현재컴퍼니)

‘여자’와 ‘남자’라는 차이를 종이 한 장쯤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런 일은 연극 무대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남자는 이래야 해”라는 말을 수도 없이 주입하고 연습하며 그 여자들이 몸에 붙인 ‘남성성’이 얼마나 폭소를 자아내는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그녀들의 숨겨진 상처와 비밀이 하나하나 속속들이 드러난다. 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는, 그 부부 생활에 정작 있어야 할 것들은 다 메말라 버린 지 오래라는 남들도 모두 다 아는 비밀 말이다.

118년과, 한바탕의 해프닝. 격차는 수치상으로 너무나 큰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는 누구도 혜택을 보는 것 같지는 않다. 한쪽이 지극히 부당한 대우를 감내한다고 해서, 다른 한쪽이 그만큼 더 누리는 것 같지도 않다. 비밀은 어쩌면 거기에 있지 않을까. 고초라면 이미 충분히 겪었다. 남자도 여자도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김원(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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