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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오늘의 시대에서 해방신학은 유효하고 정당한가?[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마지막 회
홍인식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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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22  14: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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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대에서 해방신학의 유효성과 정당성에 대해서 많은 의견이 있다. 특히 1989년 동유럽의 몰락과 더불어 현실적 사회주의가 실패한 상황에서 해방신학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은 신학자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혁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뜨거운 주제로 등장했다. 과연 해방신학은 죽었는가?

해방신학자들 가운데에는 이 같은 논쟁 배후에 해방신학에 대한 거부가 자리 잡고 있고 따라서 해방신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면서 해방신학의 죽음에 대한 논쟁을 일축하는 분위기도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방신학의 유효성과 정당성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제1세계로부터 들려오는 해방신학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그 강도를 더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 해방신학은 죽은 것일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해방신학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채 그를 위한 진혼곡을 울리는 일 외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일까?

오늘의 상황: 억압과 해방

무엇보다도 해방신학은 억압의 상황에서 태어났다. 억압의 상황에 대한 인식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창하면서 탄생했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의 미래는 억압이라는 단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오늘의 세계에서는 억압이 사라졌는가?

요즘 우리는 개념의 평범화와 왜곡화 현상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오늘의 사회에서 근본적이고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의 사라짐과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 그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평범화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정의 혹은 억압, 해방이라는 단어는 큰 의미를 갖지 않으며 그러한 단어들은 다른 단어로 대치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어를 절도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구촌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오늘의 세계는 우리들로부터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게 하는 핵심적 단어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오늘의 세계에서 억압은 존재하고 있는가?”혹은 “오늘의 세계에서 억압받는 민중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늘의 세계에서 해방신학의 존재 정당성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억압이라는 ‘강력한 단어’는 “소외”라는 단어로 대치되고 있다. 소외라는 단어는 억압 혹은 노예화라는 단어만큼 강력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소외 현상에 대하여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소외가 더 비인간적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외는 억압과 노예화를 넘어서서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됨 자체를 부정하고 그들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로 간주하는 사회적 현상을 대변하고 있다.

소외라는 단어를 쓰든 혹은 억압, 참혹함, 노예화라는 단어를 쓰든 오늘의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억압의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삶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가난한 사람), 자신의 삶의 모습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잃은 채(노예화),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당하면서(차별) 그리고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면서(소외) 억압받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의 현실 앞에서 해방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다시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신학적 성찰에 ‘해방’이라는 단어를 도입해야 한다. 억압과 노예화와 억압의 현실과 억압적이고 차별적 체제의 ‘피해자’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우리는 다시금 해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기도하는 여성.(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현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이제 1세대와 2세대를 거쳐 3세대를 말하고 있다. 이들은 해방신학의 선구자들의 신학적-윤리적-예언자적 원리를 존중하면서도 그러나 단순히 그것을 반복하고 외치는 자리에 있지 않다. 새로운 사회적 현실이 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그들은 비판적이며 창조적 신학방법론으로 해방신학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해방신학은 삶의 현장에서 해방의 실천 행위로부터 발생하는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한 조직적이고 비판적 성찰이다. 그러므로 실천과 현장에 대한 이해와 의식은 해방신학의 핵심적 주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현장의 변화는 해방신학이 추구하고 있는 방향에 대한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1990년대를 중심으로 급변하기 시작한 라틴아메리카의 현장(가난함의 개념의 변화와 종속개념의 변화)은 신진 학자들로 하여금 해방의 개념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이것은 근본적 의미에서 최근의 해방신학을 향한 새로운 신학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게 하고 있다.

해방의 실천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현실 이해와 인식을 넘어서서 현실의 변혁을 도모하도록 한다. 해방의 실천은 우리로 하여금 지배 이데올로기와 소외 현상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그러한 현실을 초래하게 만들고 있는 역사적 모순 자체를 극복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해방의 실천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역사의 현실 - 역사적 모순의 피해자로서의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현실 - 의 변혁에 참여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해방의 실천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고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요구한다.

도전과 과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의 미래를 위하여 신학자와 신학대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지배적 신자유주의 체제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켜 가고 있다. 더욱 벌어지고 있는 빈부의 격차, 금융자본주의의 끝없는 욕망과 탐욕으로 인한 복지사회체제의 붕괴, 직업의 불안정화 등은 우리 모두를 위협하고 있다.

부의 세습이 아니라 가난을 대물림해야 하는 불공정하고 불의한 이 사회에서 해방신학자들의 임무와 기능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이 같은 상황은 해방신학자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보다 더 철저한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우리의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새로운 신학적 해석과 개념을 도출해 내는 이론적 작업이 요구되고 있다. 새로운 상황에서 신앙의 경험이 무엇인가를 신학적으로 규명해 내는 심오한 작업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까지 해방신학은 신학의 가장 기본적 분야에서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론, 신론, 교회론, 종말론, 기독교 윤리 분야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해방신학자들은 사회윤리, 땅의 신학, 노동의 신학, 여성 해방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등을 전개해 왔다. 해방신학자들은 사회학과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과의 꾸준한 대화와 만남을 통하여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해방신학자들의 신학적 공헌과 업적은 놀랄만한 것이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분야에서의 학문적 발전은 계속될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사회의 변화는 해방신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분야에서의 신학적 작업을 계속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해방신학자들이 맞고 있는 신학적 작업의 과제는 크게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경제, 환경 그리고 문화인류학이 그것이다.

Show Must Go On!

해방신학은 가난의 현실이 존재하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신학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카를루스 리바니우는 “만일 우리가 해방신학을 태동케 하였던 가난의 현실이 다행스럽게도 극복된 사회를 맞이하게 된다면, 비로소 해방신학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가난이 극복된 그 현실 속에서 해방신학은 자신의 신학적 전제와 방법론에 대하여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재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해방의 개념은 단순한 사회적 가난의 현실의 극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현실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케 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해방신학의 현재적 그리고 미래적 정당성을 발견하고 확신하게 될 것이여 또한 해방신학이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해방신학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급변하는 오늘의 현실은 해방신학으로 하여금 이 시기를 새로운 하느님의 ‘카이로스’(기회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이해하게끔 한다. 새로운 시작이 해방신학을 기다리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오늘도 해방신학은 신학자와 신앙인들 특히 보수적인 사람들의 신앙적 그리고 신학적 전제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상황에서 신학적이고 신앙적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신학과 신앙이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 가치관에 의해 변혁시키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허공을 치는 허무한 소리로 남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의 소리가 더해져 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아래에서 더욱 더 심각해 가는 부의 편중과 가난의 심화 그리고 전 지구적 환경파괴의 현실은 오늘 우리 신앙인들을 향하여 신앙적 그리고 신학적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딸들의 나타남을 고대하는 피조세계를 향하여 분명한 응답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으로서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해방을 위한 혁명가의 삶을 살아온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한다. ‘승리의 그날까지 언제나!’ 그렇다. 해방신학을 위한 진혼곡의 연주는 연기되어야 한다. 승리의 그날까지. 해방신학은 오늘도 행진하고 있다. 승리의 그날까지!

오늘의 글을 마지막으로 약 1년 6개월에 걸쳐 연재되었던 해방신학 이야기를 마친다. 부족한 글을 실어 주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해방신학의 기본적 전제인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이 오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울러 해방신학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 해방신학과 친밀해지고 그래서 해방신학을 통하여 들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나로서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동안 글을 읽어 주신 독자들께 감사를 드린다.

지금까지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를 연재해 주신 홍인식 목사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편집자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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