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4월 17일(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 요한 10,27-3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시편 23장을 노래한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고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을 인도하는 목자라는 말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실천들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었다고 믿으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생명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살고 성장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개체 유지 본능입니다. 식물이 햇빛을 향해 뻗어 나가고, 동물이 먹이를 찾아 가는 현상이 모두 개체 유지 본능이 있어 되는 일입니다. 인간에게도 그 본능이 있어, 사람은 재물을 비축하고, 권력을 갖고자 하며, 노후 대책을 마련하여 오랫동안 무사히 또 건강하게 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하여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되고자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어 살고 싶어도 합니다. 그런 현상은 보두 개체 유지를 효과적으로 하겠다는 본능적 욕구가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욕구는 인간이 사회 안에서 떳떳이 또 활발하게 사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 욕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욕구를 정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칭찬도 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구성원 모두가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어 보호합니다.

신앙인은 인간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사회 질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인은 그 나라의 질서를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자기의 소원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질서를 살아서 그분의 뜻이 자기 안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목자라 불렀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가치관으로 된 질서, 곧 하느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 '목동과 양떼', 카미유 피사로.(1887)

개체 유지 본능은 이기적 욕구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웃을 외면하고 하느님과 교섭하여 자기 한 사람만 잘 살고, 자기 한 사람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가 권장하던 것이 각자 율법을 잘 지켜서 자기 한 사람 잘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겨야 한다는 이스라엘 초기의 신앙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개체 유지의 본능은 또한 자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망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율사와 사제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역할을 빙자하여 스스로를 과대 평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종교 지도자들이 쉽게 빠지는 권위주의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이기적 신심과 지도자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이 중심이 된 질서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베푸셔서 생명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게 하십니다. 하느님에게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하느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버리지 않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 버린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제거한 것은 그분이 주장하는 자비를 하느님의 것이라고 그들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개체 유지에 성공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만자족할 것도, 자화자찬할 것도 없는 이들입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과대평가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낮추어 대가 없이 봉사하는 질서를 가르쳤습니다. 개체 유지에만 골몰하지 않고, 대가 없이 스스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실천을 위해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개체 유지를 자기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으면, 우리는 이해타산을 따지며 전전긍긍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우리는 스스로를 내어 주고, 이웃을 섬기면서 환희에 젖는 체험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가 애써 가꾼 우리의 개체가 지상 생존을 끝내면서 우리도 사라질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대중가요의 한마디가 우리 인생의 그런 허무를 대변합니다. 이웃과 경쟁하고, 미움에 젖고, 분노에 시달리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인생입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내어 주고 쏟는’ 하느님의 생명이 지닌 질서에 충실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또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 살기에, 하느님과 더불어 지속되는 세계에 삽니다. 예수님이 사셨고, 또한 부활하여 사시는 세계입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교회를 위해, 인류를 위해 전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관심을 기울이자는 날입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는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내어 주고 쏟는’ 삶, 곧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살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생존 경쟁에 자신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신자들로부터 존경받으며 살겠다고 택하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넓은 세계에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하기 위해 봉사하겠다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펼쳐 보여 주신 하느님 중심의 세계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이웃과 함께 나가겠다고 마음먹고 택하는 길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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