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46]

욜라도 누나 따라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배우고 싶다고 선뜻 시작하면 그만두기도 쉬울 것 같아 나는 좀 뜸을 들이면서 욜라의 의견을 계속 물었다. 그랬더니 발레를 배우고 싶다는 욜라의 마음은 몇 개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우리 가문에 ‘빌리 엘리어트’가 나오려나 생각도 해 보았지만 돌연변이가 아닌 이상 유전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발레를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욜라를 보며 괜한 돈은 날리지 않겠다는 믿음으로 발레리노 의상을 사기에 이르렀다. 하얀색 쫄티에 밑단의 프릴이 포인트인 검정색 멜빵 바지로 그야말로 악 소리 나게 귀여운 의상이었다. 그 옷을 입고서 발레 학원 유치부의 청이점(누나 따라 발레 다니는 남아가 한 명 더 있단다!)인 욜라가 클래식 음악의 선율에 맞춰 발끝을 세우고 손을 나풀대는 모습은 아무리 상상해도 질리지 않았다.

발레가 바른 자세를 몸에 익히는 데 좋다는 것, 특히 멋진 다리 라인과 유연함을 선사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남편은 뭣 모를 때 어서 보내자고 했지만 아아, 신중함도 병이려니! 나는 욜라의 발레 시작 시기를 미루어 유치원 들어가는 때와 맞추자고 하였고 그것이 결국 모든 일을 어그러지게 만들고 말았다. 발레가 다 무어냐, 유치원도 안 다닐 판인 욜라는 멜빵 바지 한번 입어 보자고 애원하는 엄마를 피해 도망을 가기 바쁘다.

나는 블랙 토슈즈를 끌어안고 넋두리를 했다.“욜라야.... 지금까지 발레 하겠다고~ 하겠다고 엄마한테 말했잖아. 그래서 너만 믿고 옷이며 신발이며 다 샀더니 이제 와서 넌 안 한다고 하는구나. (울먹) 그럼 이제 이건 다 어쩌지? 이걸 다 버려야 한다니 엄만 너무 슬프다~~ (울먹울먹)” 이내 심경의 변화를 느낀 듯한 욜라가 내게 다가와 나직이 “엄마....”하고 불렀다. 나는 “응? (이제 발레 가려는가 보다.)”하고 반색을 하며 반전을 기대하고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엄마!... 힘내!”하고 말해 주고는 다시 쏜살같이 도망을 가는 욜라였다.

발레 선생님도 애쓰셨다. 선생님은 아이언맨도 처음엔 발레부터 시작했다고 하며 레이저 광선 쏘기 스트레칭을 30분 내내 선보이며 욜라를 발레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욜라는 끌려온 소 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반짝이는 튀튀를 입은 여자아이를 보고 눈길을 거두지 못하며 “엄마, 저 언니.... 예쁘다.”하고 중얼거리듯 말했을 뿐이다.(욜라는 아직 남녀에 대한 명칭을 혼용하고 있다) “응? 저 누나가 예뻐? 그래 참 예쁘구나.” 하고 발레리노 옷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게 발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지금 다섯 살 아이들 심정이 말이 아니에요~ 엄마 떨어져서 유치원 다닌다고~ 마음이 다들 허해요. 허해.(그러니 지금 안 하겠다고 버티는 것도 다 이해해요)”

어쩜 나는 복도 많다. 아이의 마음을 살펴보는 눈을 가진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으니. 나는 그런 선생님께 더욱더 욜라의 매끈한 각선미와 곧게 뻗은 척추기립근을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마음 허한 욜라는 하루는 발레를 하겠다고 했다가 다음날이면 발레를 하지 않겠다고 나를 약 올리며 허송세월을 보냈고 발레 선생님과는 사제지간이 아닌 서로에게 아이언맨 파워 공격을 날리는 사이로 남고 말았다.

▲ 동생과 누나를 자전거 태워 주는 천하장사 욜라. (왼쪽부터)욜라, 로, 메리. ⓒ김혜율

문제는 상표도 떼기 전 바로 내팽개쳐진 발레 옷과 신발이 아니다. 당면 과제는 어떻게 아침마다 욜라를 유치원에 제 발로 가게 하는가가 아닌가. 이번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리틀 강호동을 핑계로 유치원 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욜라. 유치원 선생님께 실상을 여쭈니 리틀 강호동은 워낙 덩치가 좋아 모든 행동이 크게 보여서 조금 부딪힌 것도 마치 때린 것으로 아이들이 느끼는 것이지 실제로 다른 아이를 괴롭히려는 악의는 없는 친구라고 했다.

그래도 덩치가 덩치이니 만큼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나에게 유치원 안 가겠다고 우는 욜라를 번쩍 들어 안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온 남편이 말했다. “오늘 보니까 리틀 강호동이도 울고 있던데?” 아! 정녕 우리의 리틀 강호동이는 샅바를 잡고 모래 바람을 일으키는 씨름판의 황제가 아닌 귀여운 ‘아기 곰돌이 푸’였단 말인가! 잉잉 우는 곰돌이 푸가 더 강한지, 지구를 지키며 무엇이든 폭파시킬 수 있는 리펄서 광선을 쏘는 아이언맨이 더 강한지는 삼척동자도 다 알 터.

그러나 이렇게 어른의 관점으로는 사실에 기초해서 간단히 정리되는 상황이라도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세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곰돌이 푸가 다정하게 안아 주는 유치원이라도 욜라에겐 자기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악당이 있는 곳이라는 것인데, 나를 비롯한 온 가족은 욜라의 ‘유치원 악당 존재설’을 존중해 주기로 뜻을 모았다.

그런 취지로 무도에 조예가 깊은 남편(그는 스무 살 젊은이 시절 <태권도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바 있고, 택견의 전통 무술에 대한 고찰과 계보와 같은 논문도 호평을 받은 적이 있으며 그의 인생 최종 목표는 청바지를 입고 장작을 패는 머리 하얀 노인이다!)은 욜라를 데리고 동네 유도장을 방문해 몸소 앞구르기와 회전 덤블링 시범을 보여 주며 이것이 바로 유도다, 한번 해 보겠는가! 하고 외쳤다.

욜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킥복싱 체육관에 들렀다. 체육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복싱 체육인들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땀 내음에 내가 압도된 것처럼 욜라도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곳 관장실에서 내가 체육관 관장님과 7세 미만 아동의 신체적 사회적 발달에 따른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관장님은 세 아이의 아버지로 유아 체육에 무척 조예가 깊은 분이셨다. 어쩐지 조예가 깊다는 것은 피곤한 것이구나를 깨닫게 된 장장 30분이었다.) 남편은 체육관을 돌며 아이들에게 글러브니 샌드백, 펀치볼 같은 것을 보여 주며 놀았다.

어딜 가나 다섯 살 욜라는 제대로 된 격투 무술을 배우기엔 나이가 어리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 일련의 과정들이 욜라에겐 나도 강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집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앞구르기를 하며 체력을 다지는 욜라의 발에 걷어차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며 다녀야 하는 부작용이 있지만 가슴에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를 새기고 오늘 자신의 행동이 아이언맨을 비롯한 용사들에 가까웠는지 아니면 비겁한 악당들에 가까웠는지 자기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은 참으로 뿌듯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마음은 지구를 지키는 영웅인데, 현실은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다. 욜라도 그것을 알고 있다. 신발 신다 잘 안 돼 울고 있는 욜라에게 이 한 마디만 건네 보자. “욜라야? 너~ 아이언맨이 신발 잘 안 신겨진다고 우는 거 봤어?” 욜라는 잠깐 생각을 할 것이고 절대 본 적이 없는 우는 아이언맨을 떠올리고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용사로서의 품격을 갖추려고 몸과 마음을 추스를 것이다.

유치원에 가는 길, 뒷자리에 탄 메리와 욜라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 유치원 가기 전 칼싸움 한 판. ⓒ김혜율
메리 : 욜라야, 너 리틀 강호동이 이길 수 있어. 어떻게 하냐면 점심시간에 밥 먹을 때 밥을 두 그릇 세 그릇 먹어 버려! 그럼 힘이 세질 거야.
욜라 : 하하하~ 그거 좋은 생각인데? 내가 그럼 리틀 강호동이를 무찌를 거야!
메리 욜라 : 우히히히 우낄낄낄

그 뒤 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메리와 달리 욜라는 신발장 앞에서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총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쳤다는 반공 소년처럼 “나는 유치원이 싫어! 하늘만큼 땅만큼 싫어~!”라고 서슴없이 외치며 천사 같은 유치원 선생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서 말이다. 이럴 때 욜라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논리정연한 설명도 감정에의 호소도 아니다. 그건 유아교육학 박사로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계시며 현장 경험이 풍부한 원장 선생님까지 달려 나와 욜라를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는 데에도 드러난다.

욜라는 유치원에 가야 하는 이유 101가지와 가지 않으면 후회할 이유 99가지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 욜라야! 너 왜 꿈쩍도 안하고 있니? 신발에 본드가 붙은 거 아니야? 이런~ 본드를 떼야 하는구나. 이영차, 어영차, (본드떼는 시늉)”에 신발을 벗고 교실로 들어갔다. 그 다음날에도 유치원에 가야 하는 이유와 가지 않으면 후회할 이유를 추가로 대여섯 개 더 발굴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엄마 아빠가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서 욜라가 뭐하고 노나 볼게”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 다음날에는 붙이고 있으면 용기가 샘솟는 터닝메카드 밴드를 손등에 붙이고 등원을 하였고, 그 주의 마지막에는 독수리가 그려진 티셔츠에 독수리오형제 만화 영화(언제적 독수리냐 싶지만) 주제가를 들으며 유치원에 갈 수 있었다.

나는 한동안 이런 느낌을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엄마들의 커뮤니티에 ‘허를 찌르는 아이 유치원 등원시키기 방법’을 공모하기도 했다. 마치 거란의 무리로부터 우리의 강동 6주를 개척할 수 있게 했던 고려 시대의 서희 외교술 저리 가라 할 만큼의 온갖 지력을 다 짜내 보려 한 것인데, 그 결과 지금 욜라는 ‘내일은 유치원 안 갈 거야.’ 한다든지, ‘오늘은 조금만 놀다 올 거야.’라는 말을 하며 유치원에 잘도 다니고 있다.

그리고 유치원에 가더니 생활습관과 인성이 날로 훌륭해지고 있다. 어제는 자기 전에 내 손을 꼭 잡고 “엄마, 힘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사랑해, 사랑해. 미안해, 미안해. 누나 미안해.”하는 말을 하며 엉엉 울었다. 작은 악마가 들렸나 싶을 정도의 온갖 장난질에 지치고 피로했던 나와 메리도 눈시울을 붉혔고 우리는 사랑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속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이지 이것이 아이를 키우는 보람이요, 모든 피로를 씻은 듯 가시게 하는 힘이 아닌가 싶다. 이런 행복한 감정을 알게 해 준 욜라가 참 고맙다. 말 안 듣고, 아프고, 싸우며 크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이런 마음을 전해 주고 싶다. 맨날 받기만 했던 아이들의 ‘깜짝 편지’를 나도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에게 전해 줘야 겠다. 작은 종이 쪼가리에 ‘오늘도 수고했어. 보고 싶었어.’라고 쓰고 그림도 그린다. 맨 마지막에 ‘하트 뿅뿅’을 첨가하는 것이 중요 포인트다.

▲ 씨 뿌리는 욜라. ⓒ김혜율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4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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