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월) 용산 생명평화 미사

 

4/20(월) 저녁 7시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이날 미사는 김정대 신부님(예수회)과 문정현 신부님(전주교구)께서 공동으로 집전하셨습니다.

강론 (김정대 신부님)

많은 사람들이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골머리를 앓고 있거나 그 상황과 관련하여 그 복잡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무언가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끊임없는 물질에 대한 집착이 있고, 어떤 성공에 대한 집착이 있고, 아니면 사람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질적인 ‘병마’라는 고통에 처해서 그 고통을 떠나고 싶은 갈망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물질을 획득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병마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어야 한다면 하느님은 매우 바쁜 분이시겠지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은 매우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에서 모든 사람이 합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도대체 하느님더러 어떻하란 예깁니까? 우리가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이 너무 유치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이 기도를 소원성취 정도로 이해하고 그렇게 합니다. 유치합니다. 이런 삶의 자세 안에 영적인 차원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사건은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현재의 고통이나 집착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부활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초대받았고 세상을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

병을 바라볼 때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을 내 몸 밖으로 떼 내야한다는 의미로 병을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병을 함께 사는 손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몇 몇 나라에서는 우리보다 암 완치율이 낮지만 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우리나라보다 낮은 나라가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환자들에게 암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즉 암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줍니다. 그래서 암으로 인한 사망이 아니라 자연사 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암을 내 몸 밖으로 떼 내어야 하기에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경우 자신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난 후 완치가 되지 않아 사망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 하여 세상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살았던 가치관에서 탈피하여 하느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달리보이고 나의 그런 소탈한 마음은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든 세상에서 어느 것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음을 쉽게 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가치관으로 재단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추구합니다. 세상은 최고와 최초와 최대를 추구합니다. 그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을 당신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심지어 모기를 생각할 때 우리는 쓸데없는 존재로 생각하지만 모기가 없다면 우리의 생태계는 심각하게 교란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 화가 우리에게 미치게 됩니다.

용산은 참 유지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가치가 아닌 여전히 우리의 가치관이 드러난 곳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유치함이 드러날 곳이 서울에서만 200여 곳이 더 있다고 하니 끔직합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을 유치함이 아닌 하느님의 가치를 따르는 내가 되고 또 그런 환경으로 만들지 않는 한 이런 끔직한 현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도 종교지도자 이지만 하느님의 가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현실의 가치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 최고의회의원, 등등과 같은 가치와 위치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로부터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역시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도전입니다. 유치함으로부터 벋어나 영적인 차원의 삶을 살도록 도전합니다. 영적인 차원의 삶에서는 경쟁이 아니라 평화와 협조, 보살핌이 있습니다. 돈의 소유가 아니라 나눔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치한 단계의 삶에서는 나의 겉으로 드러난 지위와 자신이 무엇을 소유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더 갖기 위해서, 더 높은 지위를 위해서 사기와 폭력이 판을 칩니다. 우리도 니코데모가 도전 받았듯이 예수의 이 도전을 성실하게 대면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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