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신부의 '환대의 집' 여행-4] 뉴욕에서 만난 친구들
허름한 ‘성전’을 채우는 환대의 마음, 가톨릭일꾼 운동
문정현 신부를 미국에 초청한 것은 가톨릭일꾼 운동의 마사 헤네시다. 그녀는 지난해 강정을 방문해 “성찬례적 저항”이 매일 이뤄지고 있는 강정에서의 경험을 가톨릭일꾼 운동 활동가들과 공유했다. 성 요셉 하우스를 운영하며 함께 일하고 있는 카먼은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으로부터 문 신부 초청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뉴욕 대교구는 맨해튼 한복판에 크고 화려한 성당을 몇 개씩이나 가지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이 벌어질 때 밤샘 노숙을 하며 텐트를 치고 있던 광장에서 5분 거리에는 트리니티 성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성당에서는 1퍼센트의 가진 자들이 99퍼센트를 지배하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외침에 화답하지 않고 성당을 개방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사 또한 작은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뉴욕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성 패트릭 성당 입구에서는 안전 요원들이 가방 검사를 했다. 혹시나 화려한 ‘성전’에 흠집이라도 날까 경호원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화려한 ‘성전’에 비하면 메리하우스는 그야말로 판잣집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허름한 ‘성전’에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환대의 마음, 그곳이 계속 유지되길 바라는 빈자들의 소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돈이 가득한 곳과 마음이 가득한 곳, 나에게는 마음으로 가득한 곳에 더 좋았고 그것에 내 마음도 함께 더하고 싶었다.
‘당신들 덕분에 강정이 알려질 수 있었어요.’- 노둣돌 이주연 활동가
강정 마을이 투쟁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과정에서 미국 현지에서 고생한 활동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방문으로 그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노둣돌뿐 아니라 재미 청년 단체들은 정기적으로 청년들을 강정을 비롯해 한국 곳곳으로 보내고 있다. 이번에 문 신부의 강연 일정을 도왔던 이주연 활동가는 영어와 한국어 모두 능통해 신부님 곁에서 통역을 도왔다. 신부님의 이야기에 때로는 울먹이며 웃으며 화내며 함께 통역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녀는 휴가를 내고 월차를 쓰고 조퇴를 하며 우리와 함께 했다.
우리가 그녀의 회사가 있는 월스트리트에 갔을 때는 전화 한 통에 달려 나와 9.11 현장과 월스트리트를 소개해 줬다. 그녀는 “세계무역센터는 어디에서나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그날 아침 그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회사 창문을 통해서 보고 정말 놀랐다”며 “근처에서 일하던 친구는 사고가 나던 날, 머리에 먼지를 10센티미터 정도 뒤집어쓰고 차가 다니지 않아 4시간 정도 걸어서 빠져 나왔었다”고 했다. 당시의 충격과 공포가 어떠했는지 상상하기 싫을 정도였다. 그 뒤 월스트리트는 차량 통행이 전면 제한되어 있었고 삼엄한 경비를 지나고 나서야 건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장소와 박물관이 만들어졌고 그 뒤편으로 80층 높이의 무역센터 두 동이 공사 중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바벨탑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 아찔한 높이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이주연 씨는 “이렇게 우리는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테러 후에도 계속 높은 빌딩을 짓고 있죠.”
그녀는 9.11테러 이후 미국이 군사화되는 것에 대해 우리들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줬다. 특히 대학생들을 학비를 지원하는 명목으로 군인이 되게 하는 시스템이 결국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는 계층의 학생들을 전쟁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녀를 비롯한 재미청년단체의 활동가들은 서로의 시간을 쪼개서 미국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서로 공부하고 나누며 한국 청년들보다 더 한국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두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로 언제나 발로 뛰는 그들이 있기에 강정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있고, 많은 이들을 강정으로 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You're on the right track”- 미국 평화운동의 상징 대니얼 베리건 신부를 만나다
11일 오전 문정현 신부는 대니얼 베리건 신부(95, 예수회)를 만나기 위해 브롱크스로 향했다. 대니얼 베리건 신부는 그의 동생인 필립 베리건 신부와 함께 평화운동을 해 왔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 젊은이들에게 보내질 징집 영장을 태우는 활동을 시작으로 ‘칼을 쳐서 보습을’ 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 대니얼 베리건, 필립 베리건 두 형제와 여섯 명의 활동가는 미국의 핵미사일 공장에 들어가 무기를 부수고 피를 뿌리며 살인 무기 생산에 반대했다. 이 활동으로 구속되고 투옥되었다. 그 뒤에도 미국의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을 꾸준히 해 왔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시를 쓰기도 했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과 오만함아 가득한 도시였다. 어지러운 높은 빌딩 숲을 지나 동쪽 외곽 ‘메리하우스’에 도착하면 그제야 빌딩 숲이 아닌 하늘이 보였다. 숨통이 틔었다. 가톨릭일꾼 운동에 도착한 첫날 주방에서 드렸던 미사가 생각이 난다. 낡은 건물은 방음이 되지 않아 사이렌 소리, 경적 소리 온갖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다. 식탁 사이로 제대가 차려지고 미사가 시작됐다. 쥐가 드나드는 곳에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강정에서의 미사가 생각이 났다. 자본의 심장이라는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가난과 환대의 정신을 말하는 이들은 해군기지라는 엄청난 폭력을 앞에 두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강정의 사람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닐까. 국경도 언어도 다르지만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하는 세상의 시선에 맞서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강정에도 뉴욕에도 있었다. 이들의 연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문정현 신부와의 뉴욕 동행기를 4회에 걸쳐 연재해 주신 한선남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한선남
문정현 신부와 함께 평화활동가 단체 ‘평화바람’에서 일하며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운동을 해 왔다. 현재는 강정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