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미사

4/16(목) 저녁 7시,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이강서 신부님(서울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장위1동선교본당 주임)과 문정현 신부님께서 함께 집전하셨습니다.

강론 (이강서 신부님) - 일부

찬미예수님.

저는 서울교구 빈민사목 이강서 신부입니다.
부활때도 함께 미사를 봉헌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기쁘게 하고 있는데
누구보다 기뻐야 할 사람들이 용산의 희생자들이고
이 현장을 지키고 있는 철거민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이 자리에 다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복음. 루카 24,36)

성경은 늘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여기 앉아계신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천주교 신자이실텐데
신자가 되려는 예비자들에게 왜 천주교 신자가 되려고 하느냐
제가 예전에 설문지를 통해 물어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10명 중에 9명이 이런 답변에 체크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천주교를 믿겠다고 쓰신 거죠.

그분들의 지향은 아마 여기 앉아계신 다른 분들에게도 공감대가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심지어는 무당을 찾아가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해주시는 그 평화는
우리가 바라는 그 평화를 말씀해 주시는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평화의 인사에서,
평화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평화이기도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아무나 들으라고 하는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평화를 인사하는 이분이 어떤 분입니까?
참혹하고 억울하고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치욕스런 죽음을 겪었던
그 수난과 고통을 겪었던 그분의 입에서 나온 평화라는 점이 첫 번째입니다.
누구라도 평화를 얘기할 수 있지만,
그 치욕스런 상황을 겪어 본 사람이 얘기하는 평화는
평화의 무게가 다른 것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들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던 대사제들, 백성의 지도자들,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모른채 부화뇌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여도 싸다고 외쳤던 사람들에게 건네진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던 죄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무서워서 집안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하신 인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영웅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모두 도망갔던 나약하고 겁 많고
사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이 평화의 인사를 한 것은
모진 괴로움과 고통, 치욕 속에 사는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말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하는 인사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 세상에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원합니다.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고, 우리나라가 전쟁 없는 평화로운 나라이길 바랍니다.
우리 사회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갈라서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없지요. 없습니다.
성당에서도 매 주일 미사 때 세계평화를 위해 보편지향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기도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평화가 입에만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요?
입으로만 평화를 원하고, 입으로만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수단, 평화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단들은 우리가 아는 바 없고 관심없고,
오로지 듣기 좋은 말로만 평화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나라가 우리사회가 평화와 먼 폭력과 전쟁,
그리고 힘없는 사람을 짓밟는 참담한 현실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이 건네주는 평화의 인사의 알맹이가 무엇입니까?
불특정 다수에게 듣기 좋으라고 말로 인사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입으로만 단어로만 존재하는 평화를 얘기하신 것이 아닌,
실제 참평화를 말하신 거라면,
그 평화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그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1963년, 당시 교황님인 요한 23세가 지상의 평화라는 짧은 회칙을 써냈습니다.
그때는 쿠바 미사일 위기,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할 일촉즉발의 위기,
세계 평화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교황님이 쓴 회칙에는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해야할 몇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때 평화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의무가 있는데,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고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는 남에게 양도할 수 없고,
남에게 맡겨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고, 각자가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권리는 동시에 타인에 대한 의무입니다.
아무도 권리를 존중하거나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호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인권은 절대로 침해받을 수 없다"고 우리는 선언하고 외치지만,
다른 사람이 그 권리를 우습게 여길 때, 인정하지 않을 때,
지켜야 할 의무라고 대하지 않을 때 그것은 구호에 불과한 것입니다.

국민이 세금을 내면서 인간이 한 국가에서 살 때,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국가에 권력을 준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기본권을 지켜주지 않고 오히려 짓밟는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권은 허공에 떠도는 외침에 불과하게 됩니다.

세계평화, 우리가 염원하는 우리 나라, 우리 사회, 우리 마음의 평화는,
우리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나의 권리가 중요한만큼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다는 마음이 없다면
평화는 그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는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사탕 주듯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선물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 욕심입니다.
둘째는 칼자루를 쥔 힘있는 사람들이 이 평화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세계평화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때
바로 그 때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 3개월 전에 세계의 평화, 한 나라의 평화가
무참하게 허망하게 불로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했고
바로 그 현장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평화를 얘기하셨습니다.
있지도 않은 평화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평화를 되살리는 그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계신 것이지요.

어제 독서말씀이었지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을 멀쩡하게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죽은줄 알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이 사람들에게 힘을 줘서 놀라운 일을 하게 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죽으면 끝이야..."
우리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증명해 보였습니다.
죽으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
우리 머릿속에서 잊혀질줄 알았는데,
죽으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안죽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도 그렇게 할 힘이 없는데,
죽은 줄 알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산 사람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이것이 바로 부활의 증언입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 경찰, 검찰,
그리고 용산 문제를 바라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 사람들이 죽어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우리 뇌리 속에서 없어져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돌아가신 희생자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몇십배 몇백배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속이나 성당에서 기념하고 그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매일매일,
죽은 이가 산 이보다 더 큰 힘으로 우리 사회를 바로 만들고
우리의 삐뚤어진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서의 미사를 통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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