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철학자들은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둘에게는, 세상에 오직 둘만 있는 순간이 존재해야 하고 그 ‘둘의 무대’를 지속시킬 수 있느냐에 이 사랑의 가능성 여부가 달려 있다는 뜻인 것일까. 이윤기 감독의 영화 “남과 여”에는 참으로 ‘둘’이 되기 어려운 복잡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서로 끌리지만, 잠시 같이 있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애매한 건지 우유부단한 건지 비겁한 건지, 그들은 내내 고민하지만 내내 헤맨다. 둘도 그렇다고 혼자도 못 된 채로 어정쩡하게 어딘가에 살고 있다. 혹은 서성대고 있다.

▲ 기홍(공유 분).(사진 제공 = (주)쇼박스)
이제 사랑은 발명되어야 하는, 아니 심지어 한병철의 책 “에로스의 종말” 서문에서 알랭 바디우가 썼듯 “랭보의 말처럼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하는” 종류의 것이란 말인가. 사랑을 발명하려면 적어도, 사랑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다. 영화 “남과 여” 속의 기홍(공유 분)과 상민(전도연 분)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긴 한 것일까. 변죽만 울린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참으로 집중력이 떨어진다. 아이가 태어난 이래 잠시도 마음속에서 아이를 내려놓지 못했을 게 뻔한 그런 남녀가, 아이가 이국 핀란드의 국제학교 캠프를 간 그 비어 있는 시간 동안에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

기본적으로 이 아이들에 대한 설정은, 멜로에 빠지려는 감정을 대단히 휘저어 놓는다. 아이가 아프다는 것, 어쩌면 평생 자라거나 나아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은, 멜로와 정반대의 대척점에 사람을 갖다 놓는다. 일단 죄의식 비슷한 것이 들기 시작하면 ‘격정 멜로’는 힘들어진다. 이 설정이 워낙 강력하다.

남자와 여자의 문제란 어쩌면 그 사회의 통제 범주를 어지간해서는 벗어나서 생각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역사상 최고의 우유부단한 세대인지도 모른다. 그 우유부단함은 정치적 선호나 투표나 밥벌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아니 가장 내밀한 남녀관계에서조차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반반’이라고 말하는 게 버릇이 되다 못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식의 표현이 입에 붙은 남자. 어쩌면 정말 좋은 게 어떤 건지를 선택하거나 누려 본 적이 없는 듯도 한 남자. 그런 남자인 기홍. 배우 공유는 그의 느낌과 눈빛, 분위기를 아련하게 잘 살렸다. 전도연은 섬세한 표정만으로도 그들 관계의 복잡한 심정과 애절함을 여지없이 보여 준다.

▲ 상민(전도연 분).(사진 제공 = (주)쇼박스)
이 영화에 대해 굳이 ‘현실성’의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다. ‘정통 멜로’를 표방한 만큼, 관객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영화인 것은 맞는 듯하다. 다만 그 의도적으로 부과되고 의도적으로 절제되어 있는 많은 것들이 끝내 아쉬웠다. 그 아쉬움이 또한 우리를 현재 둘러싸고 있는, 제작진이 고심 끝에 내놓은 우리 시대 정서의 한 축이라는 느낌이 들면 마음 한 구석이 휑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을 잠시 잊고 몰두하는 것조차, ‘현실’이 어지간해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깨우쳐 주려고 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의 상황이 너무나 잘 느껴진다. 쉴 새 없이 따라붙는 잡념들이 그 동화 같은 숲 속까지 질기게 따라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나 공허감을 딛고, 언젠가는 저 설원에도 새로운 길을 낼 수는 있는 것일까.

“얘기 좀 해요.”
“우리가 할 얘기가 뭐가 있어요?”

메아리로조차 퍼지게 될까 봐, 좁은 차 안에서 낮고 억눌린 음성으로만 잠깐 토해지는 그 갈 곳 없는 말들처럼, 그들은 힘은 없지만 사랑한 것은 맞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에로스의 종말”의 한 구절을 영상으로 충실히 구현한다. 그래서 재미없다고 푸념하며 털어 버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영화다.

격정 멜로라도 기대했다면 어딘가 겸연쩍어지는 기분이다. 아 이 허전함이라니! 그런데 이게 딱 지금 우리의 현실인 것 같은 씁쓸한 공감이라니. 부정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어서, 저만치 그저 ‘영화’로 두고 싶은 기분은 마치 먼 나라 핀란드의 눈 덮인 숲처럼 아련하여서 그저 그림 같다.

▲ (사진 제공 = (주)쇼박스)

 
 

김원(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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