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신부의 '환대의 집' 여행-2] 미국 대학생을 만나다 1

가톨릭일꾼 운동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문정현 신부의 주된 일정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강연이다.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에서의 미 군사주의의 본질을 알리고 강정의 투쟁을 알리는 것이다. 강연 시간은 1시간. 통역을 제외하면 약 30분의 시간 동안 그는 50년의 경험을 압축적으로 이야기해야 했다. 경우에 따라 20분 정도만 허락된 경우도 있었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강연 준비를 하는 내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영문으로 그리고 국문으로 된 강연 자료를 수십 번을 보고 연필로 메모도 하며 준비했지만, 문정현 신부의 인생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었다. 강연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He is attractive”

▲ 문정현 신부가 미국 대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다.(사진 제공 = 한선남)
3월 4일 성 요셉대학에서 팔레스타인의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학생 그룹과의 만남이 첫 강연이었다. 그는 첫 강연을 영어로 준비했다. 미국 메리놀 신학대학에서 2년간 유학생활을 하고 졸업 논문까지 쓴 그였지만 이미 20년 전의 일이라 잘 할 수 있을지 브루클린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전전긍긍한다. 그에게 허락된 30여 분의 시간 동안 한국 분단과 주한 미군의 문제 현재 강정 상황까지 숨차게 달려간다.

“미국은 세계의 악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아셔야 해요. 한국의 독재 정권을 인정한 것이 바로 미국입니다. 그리고 그 독재 정권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한국을 지켜 주기 위해 미군이 주둔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을 겨냥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좇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의 분단 역시 미국의 이익 속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강정 마을 사람들은 활동가가 아니지요. 어부이고 농부입니다. 그래서 지금 해군기지가 완공된 시점에서 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평화 마을을 선포했습니다. 강정 마을은 생명과 평화이고 해군기지는 죽음의 문화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깃발을 세운 것입니다. 두고 봅시다. 언젠가 강정해군기지는 미군의 기지가 될 것입니다.”

강연이 끝나자 몇몇은 남아 이야기를 이어 간다. 팔십이 다 된 문 신부에게 ‘매력적’이라고 칭찬한다. 젊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더 힘을 발휘하는 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의 ‘매력’이 멀리 뉴욕의 젊은이들에게도 영감을 준 것이다. 매력적으로 첫 강연을 끝낸 그에게 두 번째 도전은 좀 쉬웠다. 노둣돌을 중심으로 뉴욕에 살고 있는 한국인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강연은 한국어로 준비됐다.

끝나지 않는, 끝낼 수 없는 이야기

5일 두 번째 강연은 한국어와 영어 통역이 동시에 이뤄졌다. 영어의 부담에서 벗어나니 문 신부는 주저함 없이 이야기를 한다. 예상했던 강연은 한 시간, 그런데 두 시간 넘게 진행되고야 말았다. 노둣돌의 이주연 활동가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와도 이렇게 길게 한 적은 없었고, 사람들이 끝까지 남은 경우도 없었다”고 한다. 참여한 재미 동포들은 함께 웃고 박수 치기도 하며 두 시간을 함께 달려왔다. 이날 문정현 신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13살 때쯤으로 기억하는데.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제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주둔했었습니다. 우리는 기지 안에 들어가서 그릇을 씻고 먹을 것을 얻어 오곤 했죠. 하루는 미군 전투식량(시레이션)이랑 몇 가지를 더 받아서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군인 둘이 저를 불러 세웠어요. 백인과 흑인이었죠. 그러더니 나를 언덕 쪽에 세워 놓고 빈 깡통을 제 머리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카빈 소총으로 제 머리 위의 깡통을 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죠.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울면서 뛰어 왔던 기억이 납니다. 이 기억을 잊고 있었는데, 군산에서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시작하면서 어느 날 기억이 나더라구요.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또 다른 점령군이라는 것을 철이 든 다음에야 알게 됐죠.”

▲ 강연이 끝난 뒤 이 모임을 조직한 학생회장 리사와 함께.(사진 제공 = 한선남)

“대추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기지를 만든다고 쫓겨나고, 해방이 된 뒤에는 미군이 기지를 만든다고 해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미군 기지를 확장한다고 주민들을 쫓아냈습니다. 주민들은 갯벌을 간척해서 옥토를 만들어 농사 지으며 살았거든요.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일군 땅이죠. 그런데 그것이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 정부에 의해 빼앗긴다는 소식을 듣고 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강연을 마치자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로 문정현 신부의 열정에 격려를 보냈다. 이 격려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는 강정 매일 미사에서 부르는 ‘일강정’을 불렀다. 가사를 이해하는 한국인들은 모두 눈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긴 강연을 마치고 뉴욕 곳곳에서 찾아온 한국 교포들과 긴 이야기 자리가 이어졌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우려와 걱정, 염려가 쏟아졌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문 신부는 심기가 복잡해 보였다. 먼 타국에서 한국의 상황을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40년 이상 최선을 다해 길 위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걱정과 염려 가득한 시선이 오히려 불편한 듯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 함께 싸워 나갈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문정현 신부가 지난 40년 동안 길 위에서 숱한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은 고통 받는 사람 곁에 남은 것처럼 다른 이들 역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인 것일까.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자신 스스로 래디컬한 삶을 사는 것, 삶이 현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강연을 그만두었다는 문정현 신부다.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변화를 촉구하고 이끌어 내고 싶은 갈망이 있음을 미국 강연을 통해 확인한다. 아직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문정현 신부. 흔들리지 않는 도인이 되기보다는 처절하게 부서지고 외면당하더라도 현장을 지키고 싶은 청년 문정현의 초심은 사제의 길 5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여전히 그는 길 위의 신부다.

▲ 강연이 끝난 뒤 사람들은 기립 박수를 쳤다.(사진 제공 = 한선남)

한선남
문정현 신부와 함께 평화활동가 단체 ‘평화바람’에서 일하며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운동을 해 왔다. 현재는 강정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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