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마리아 신부의 생각",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박정훈 옮김,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2016

어느 본당 신부의 가경자 선포 소식

▲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지난해 말인 2015년 12월 14일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교황청은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님을 포함하여 12명의 가경자를 새로 선포했다. 가경자란 한자 뜻 그대로 공경이 가능한 분으로, 성인 반열에 오르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 교회는 신앙의 행적에 따라 가경자, 복자, 성인의 반열에 올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에 한국을 다녀가셨을 때에도 124위의 초기 순교자가 복자가 되었다.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님(‘호세 마리아’ 또는 ‘아리스멘디’라 부름)은 대부분의 일반 신자에게 낯선 분이겠지만, 협동조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로 알려진 분이다. 신부님은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일군 선구자로 ‘협동조합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시성 과정이 없었다면 그분의 생애를 올바로 반추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체계에 대안이 되는 다른 경제 체계로 떠오르고 있기에 아리스멘디 신부님의 생애와 신앙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한 이 즈음에 "호세 마리아 신부의 생각"이 발간되어 더욱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님은 1915년에 나서 1976년에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스페인 파시스트 독재와 수난의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사회교리를 토대로 경제 영역에서 온 생애를 다 바쳐 신앙인이 현대사회에서 가야할 사회적 지침을 제공하신 분이다.

2012년 현재 몬드라곤 협동조합 그룹은 금융, 유통, 산업, 교육연구 등 4개 부문, 290여 개의 협동조합에서 8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총자산 규모는 360억 유로(51조 원)이며 세계적인 경제 침체에도 산업부문에만 58억 유로(8조 원)의 매출을 유지하였다. 몬드라곤에 비견할 만한 한국의 재벌기업은 현대중공업이나 GS 정도 될 것이다. 몬드라곤 협동조합과 한국의 재벌기업과의 차이는 수익이 날 때 몬드라곤은 수익 전체를 전체 노동자가 나누지만 한국의 재벌기업은 소수의 주주가 차지한다. 그 차이는 단순하지만 본질적이다.

몬드라곤 본당의 주임 사제

몬드라곤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이름이다.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님은 1915년에 몬드라곤으로부터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마르키나에서 평범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네 형제자매 중에 맏이였는데 세 살때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했다. 이 실명으로 인해 그는 늘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그가 태어난 바스크 지방은 스페인으로부터 줄곧 분리독립 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스페인과 달랐다.

12살에 아리스멘디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낀 뒤 어머니의 격려로 카스틸로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후에 그는 자신의 내면 깊이 신앙을 발견하게 된 이유가 바로 고향 마을이었음을 밝힌 바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성장을 하면서 바스크 지역의 문화와 언어를 깊이 사랑하였고 또 정통했다.

그 뒤 그는 비토리아에 있는 콘칠리아 신학교에 입학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비토리아 신학교 출신 선배 사제들의 영성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36년 그의 나이 21살에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비토리아 지방은 파시스트들이 장악하였으나 그는 마침 인민전선의 바스크 지방정부군이 지키고 있는 고향 마을에서 방학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호세 마리아 신학생도 인민전선에 가입하였다. 그는 어릴 때 사고로 당한 실명으로 인해 전투군으로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바스크 언어로 바스크 정부를 대변하는 신문사에서 편집을 맡았다.

1937년 프랑코 군대에 패배한 다음 그는 동료들과 함께 투옥되었고 군사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그는 군인임을 밝힌 덕에 전쟁포로로 분류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함께 신문사에서 일하던 동료는 자신을 기자라고 밝혀 처형되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그는 신학교에 돌아왔다. 내전 후 바스크 지역에는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바스크 언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바스크 문화는 파괴되고 정치인들은 살해되었다. 바스크 교회 대주교는 추방되고 16명의 바스크 사제가 총살되었는데 그 중에는 몬드라곤 본당의 아리스멘디 신부의 전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1년 2월, 그는 몬드라곤 본당 사제로 부임하면서 가톨릭 운동단체(Catholic Action) 전담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사회통합을 위해 자신을 바쳤고, 특히 젊은이들에게 “너의 인격을 그분께 비추어 보고 선을 행하라”며 헌신하였다. 1943년 기술전문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을 교육시켰다. 당시 몬드라곤은 성인 약 4000명의 작은 도시였는데 주민들의 후원을 받아 20명의 학생으로 학교 문을 열었다.

1947년에는 졸업생 중에 11명의 청년을 사라고사대학에 보내 산업기술공학을 배우게 했으며 졸업 후 다섯 명의 청년이 1956년에 몬드라곤 최초의 노동자생산협동조합 울고(ULGOR)를 세웠다. 울고는 처음 석유난로를 생산하였고 차차 가전제품, 기계공구, 자동차부품 등으로 확대하여 1960년대에 이미 100대 기업에 들었다. 1958년에 사회보장과 상호공제를 위한 라군 아로 사회보장협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많은 지인들의 반대에도 그 필요성을 통찰하고 기어이 1959년에 설립한 협동조합 은행인 노동인민금고(카하 라보랄)는 그 뒤 협동조합의 설립과 공동선을 위한 몬드라곤 공동체의 핵심기관으로 자리잡았다. 계속해서 산호세 소비자협동조합으로 시작해 1969년에 유통부문으로 성장한 에로스키 소비자협동조합, 1973년에 기술연구소로 계속 성장해 나간다. 1970년대에 이미 제조, 유통, 금융, 교육연구 등 4개 부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가 완성되어 개별 협동조합 간의 연대와 협력의 틀이 갖추어졌다.

이 모든 과정이 아리스멘디 신부님의 주도적인 역할로 이루어졌다. 신부님은 이 모든 협동조합의 설립에 관여하였지만 어떠한 공식적인 직함을 받은 적도 없었고 공식적인 회의에 참가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다만 협동조합 활동가들은 하루 일과를 마친 다음 호세 마리아 신부님과 모임을 갖고 협동조합의 방향과 실무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하였다.

▲ 몬드라곤 협동조합 건물 (사진 출처 = flicker.com)

몬드라곤 본당사제로서 아리스멘디 신부님은 본당사목과 가톨릭운동, 그리고 몬드라곤 협동조합에 관계된 일들을 같은 신앙과 사유에서 처리하였다. 신부님은 당시에 일반적인 경향인 가톨릭의 개인주의적 신앙관과는 달리 자크 마르탱과 엠마누엘 무니에와 같은 사회사상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와 인간 기본권이 신앙의 신조과 부합됨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1931년 반포된 비오 11세 교황의 “사십주년(최초의 사회교리인 교황 레오 13세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 기념회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십주년”에는 ‘임금 계약’을 ‘동업 계약’으로 새롭게 바꿔 임금노동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이득을 주는 방식을 권고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소유나 경영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이윤의 분배도 함께 하도록 요청했다. 다른 한편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를 겨냥하여 국가 권력자들이 ‘보조성의 원리’를 지켜 사회의 권위와 능률을 높일 것을 요구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좋은 사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년들에게 호감을 갖던 신부님은 이러한 회칙의 가르침에 따라 노동자 청년들이 민족적 사회적 계급적 차별과 탄압에서 해방되는 독자적인 경제구조를 설계하였다.

아리스멘디 신부님은 “(이윤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노동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청년 노동자들은 사회교리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사회교리로부터 인간의 가치, 노동과 자본, 그리고 조직을 공유하기 위한 협동의 방식이 공동선을 돕는 수단이라는 신념을 받아들였다.

1960년대 이르자 아리스멘디 신부님은 과도한 업무량과 심장질환으로 건강이 나빠졌다. 그러나 몬드라곤 협동조합 운동을 위한 신부님의 모습은 “마지막 남는 한 사람”까지 헌신하는 착한 목자였다. 드디어 1976년 11월 29일 비가 내리는 오후, “고통은 여전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또 다른 증거”라고 하시던 신부님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마니피캇(루카복음 1장 46절-55절)”을 바치고 완전히 소진된 채 하느님 품 안에 안겼다.

신부님의 핵심사상을 묶은 "생각"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님의 "생각"은 크게 '인간과 사회'와 '노동과 협동조합기업'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중첩되는 부분도 많다. 먼저 그가 협동조합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어떤 가치와 사고를 정립해야 하는지 특히 청년들을 위해 당부해 왔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인간의 모습이 곧 사회의 모습이다.” 인간 내면에 진정한 미덕이 존재할 때 사회의 형성이 시작되는 것이고, 같은 맥락에서 “사람이 먼저 협동조합이 나중이다.”

그렇지만 신부님은 개인의 책임성, 주체적이고 능동적 참여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체험하는 과정이 함께 할 것도 당부하신다.

“우리 스스로 더욱 자유롭고 지적이고 의식 있고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협동조합은 “사상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들의)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내적이고 사회적인 거듭남”을 체험할 때 인간은 경제적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생존의 조바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협동조합의 효율성은 인간적 가치가 순수하게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자원보다 우선한다는 데서 나온다.”

신부님은 협동조합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질 때 협동조합의 이상이 구체화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교육은 훌륭한 경제학”이며 “노동의 인간화를 실현하려면 교육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특히 인간과 노동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적인 가치를 일깨운다. “노동은 하느님의 형벌이 아니다. 인간을 자신의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인간에게 부여한 신뢰의 증거이다.”

▲ "호세 마리아 신부의 생각" (이미지 제공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경제 발전은 인간의 진보를 표현하는 것으로 진정한 도덕적 의무이다. 신자의 눈에 불완전 고용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간에 부끄러운 추문이다.”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라고 요구하는 미덕이다.”
“노동에게는 노동에게 속한 것을 주고, 자본에게는 자본에게 속한 것을 준다.” 그것은 노동이 자본에 지배되거나 자본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협동조합은 “노동과 인간을 그 힘의 원천으로 삼는 조직이다. 여기서 자본의 성격은 도구적이고 종속적이다.” 그리고 “협동조합원은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경영자”이며 “모두가 소유자이고 모두가 경영자이다.”

물론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에 놓여 있는 경제구조로서 “상이한 경제구조와 생산성 및 효율성 지표들과 경쟁해야 한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은 포기했지만, 더 많은 자본을 활용해야 할 필요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필요한 활동에 적절한 수준을 보장할 만큼 자본화 과정이 끊임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 금융, 사회, 정치 분야의 다양한 조직들을 개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생각"에는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 가운데 기관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인민노동금고’에 대한 신부님의 견해가 들어있다. “인민노동금고는 일종의 댐이자 관리 시스템으로, 금융뿐 아니라 기업 정신을 공유함으로써 신생 협동조합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신용협동조합은 협동조합운동에 필수적이다. 이것은 노동자가 스스로의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이다.”

협동조합 역사는 “노동자들이 지금까지 스스로의 결사를 통해 부당한 처우에 맞서 계속 전진해” 왔다. 계속해서 “경제생활에 의식적이고 계획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가야 하며, 소비자협동조합에서 생산자협동조합을 통해 생산에도 참여해야 한다.” 한 발 나아가서 “소비자가 투자자가 되어야” 하고 투자는 다음 세대를 위해, 곧 “세대 간 연대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로치데일 소비자협동조합처럼 대부분의 협동조합의 성공은 한 분야에서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로 편익이 확산되는 것이지만, 몬드라곤의 경우 우리 삶에 필요한 생산, 소비, 유통, 교육, 주거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요구가 충족되는 최초의 혁신적 모델로 평가된다.

결론적으로 "호세 마리아 신부의 생각"은 협동조합이 “노동과 경제 활동, 개인 활동과 집단 활동”의 “통합”이며 “자유, 존엄성, 정의라는 가치”를 되살리고 “사회생활과 경제생활 속에서 우리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이상적 수단이며 제도”임을 일깨워 준다.

시성을 청하는 기도

우리 한국의 청년들과 어려움에 처한 많은 이들이 최근에 확산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바란다. 기존의 자본주의 경제 체계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인간과 노동의 가치를 발견하고 개인과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킬 협동조합의 대안경제가 활성화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는 마음으로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님의 시성을 청하는 기도를 번역하였다. 함께 기도를 청한다.

호세 마리아 신부님의 시성을 청원하는 기도

은총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오니
오 자비하신 하느님
당신은 교회 안에서
당신 종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마다리아가 사제가
사목을 수행하도록 불러 일으키셨나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사회를 위하여
특히 노동의 세계에서
당신 종의 헌신을 통하여
드러난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나이다.

이 사제의 헌신적인 모범을
세상에 더욱 널리 알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가 되도록
성인들의 영예와 함께
교회에 전해지기를 청합니다.

저의 소원이
당신의 중재를 통해
당신께 영광이 되고
당신 백성들의 선을 이룬다면
구하는 저의 소원을
허락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조세종(디오니시오)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대전교구 카리타스 한끼백원나눔운동본부 운영위원
소셜경영연구소 소장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지역에서 펼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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